23-05-19 바이칼호수 4일 차
앞서 이틀 동안은 해가 어느 정도 뜬 다음에 움직였다면 오늘은 눈이 떠진 김에 일어나서 해 뜨는 걸 보러 호수에 나가봐야지 하고 다짐했다.
작년에 쿠바를 갔었을 때 어떤 블로그에서 카리브해에서는 해 뜰 무렵이 되면 해와 달이 한 하늘에 걸려있는 걸 볼 수 있다고 했었는데, 바이칼도 매우 넓고 막힘없는 시야를 제공 해 주니 달과 해가 함께 떠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여섯 시부터 일어나서 숙소를 나와 걸어가는데 어느새 해는 조금 나와있었다.
이미 주변이 어느 정도 밝은 것은 아쉬웠지만, 해가 좀 더 올라오는 걸 기다리면서 드넓은 초원에 앉아 전날 사다둔 방울토마토를 까먹는 건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 감동이었다.
이렇게 드넓은 평야에서 처음엔 주변이 어둑어둑하지 않을 정도로만 빛이 있던 공간에 어느새 따스한 봄볕이 골고루 대지를 채우는 장면을 보며 방울토마토를 먹어본 적 있는가.
전 회사를 다니며 수많은 밤을 새 보았고 해가 뜨는 모습은 많이 보았지만 이렇게 평화로운 일출은 2n 년 만에 처음이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할 무수히 많은 시간이자 순간. 그렇지만 그 하루가 매일 같지 않고 또 매일이 다르진 않을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나에게 잊히지 않을 아침 시간이 한 번이라도 내 삶에 있었다면 그것 만으로도 나의 이 일출 나들이는 성공.
가만히 앉아서 햇살이 호수 여기저기로 뻗어나가는걸 멍하니 바라봤다. 아침 해가 뜨며 내가 며칠 동안 봐왔던 호수 주변이 평소와 다른 색감을 뿜는 걸 보며 빛의 찬란함을 관찰할 기회가 생겼다.
평소 사진 찍는 걸 좋아하고, 특히 일상이 아닌 순간엔 필름 카메라를 챙겨 길을 나서는 걸 좋아한다. 그러면서 빛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렌즈를 통해 피사체를 보고 담음에 있어 물체에 빛이 예쁘게 맺히는 찰나의 순간을 관찰하다 잡아내는 것에서 짜릿함을 느끼기에.
그렇게 빛을 관찰하는 내가 두고두고 가끔씩 생각하는 이야기가 있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본 것 같다. 대략 초등학생 때라 제목이나 작가는 기억나진 않지만, 내용은 그림을 잘 그리는 애가 한 번은 다른 애에게 그림으로 지는 일이 생기자 분해하며 다락방에 올라가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화를 가라앉힌다. 그 과정에서 어느새 해가 졌고, 밤하늘은 자기가 그렸던 대로 무작정 까만색이 아니었다는 걸 발견했다. 자기가 졌던 그 아이가 그렸던 하늘처럼 남색, 검은색, 짙은 갈색 등 여러 가지 색이 섞인 하늘이었다.라는 이야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 가끔씩 내가 사물을 보고 이건 당연히 내가 아는 대로 “~~ 할 것이다.”라고 단정 지으려 할 때 가끔씩 생각이 나서 한 번쯤 더 돌아보게 만든 이야기이다.
이게 몇십 년이 지났음에도 생각나는 이야기인걸 보니 상당히 큰 울림이 있었음이 틀림없지만 한편으론 지금 이렇게 사물을 바라보는 순간 내가 기억하던 느낌의 색감이 아닌 걸 확인하니 관찰력 없는 나의 판단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다행히 이렇게 멋진 공간에서 이런 경험을 했으니, 그 이야기를 기억하는 만큼 이 순간이 나중에도 기억에 남겠지.
한참 바이칼 호수 앞에서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 보니 빗방울이 한 두 방울씩 떨어지길래 오늘은 뭣도 못하겠다 하면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또 내 방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고양이 님을 만났다.
문을 열자 다리 사이로 쏙 들어와서 침대를 꿰차는 모습에 헛웃음을 켜며 침대에 눕자 고양이가 내 품을 파고들어 꾹꾹이를 하더니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잠을 자는 게 아닌가.
이렇게까지 고양이에게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몸 둘 바를 몰라하며 고양이를 품에 안은 채로 고양이가 꾹꾹이 하는 걸 바라보니 다시 잠이 왔다. 약 10살 이후로는 누군가와 꾸준히 체온을 나누며 자 본 경험이 많이 없는데, 이걸 고양이가 해내다니. 뭉근한 온기를 느끼며 어느새 고양이와 같이 몸을 말고 잠이 들었다.
일어나니 어느새 밥을 먹을 시간이어서 식당으로 내려가는데 빗방울이 이마를 두드렸다. 해 뜰 땐 안 이러더니? 하며 밥을 먹고 나오는 길엔 빗방울이 꽤 굵게 내리기에 오늘 호수 구경은 좀 글렀나 싶어 반쯤은 포기한 마음으로 우선 씻고 한숨 더 자고 일어난 후 날씨를 보고 결정해야겠다 싶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비는 안 오지만 찌푸린 날씨였다. 아침에 비하면 비가 안 오는 게 감지덕지다 싶어 슈퍼에 들러 점심으로 먹을 간단한 음료수와 빵을 들고 마을을 크게 돌아 다시 호수로 가다 슈퍼를 뺀 애지 간한 가게는 다 문 닫은 이 마을에서 홀로 문 연 기념품 가게를 찾아 이리저리 둘러보다 바이칼 호수 풍경 엽서와 팔찌를 샀다.
왠지 가게에 계신 아줌마가 팔찌로 보이는걸 꼼지락 거리시는 걸 보니 왠지 여기서 파는 이 팔찌도 역시 수제작 한 느낌이 물씬 나는 것이 매우 마음을 동하게 하는 것이...! 살 가치가 물씬 넘친다고 말하는 것이..! 라며 소비 합리화.
만족스러운 소비야, 그렇고말고! 하며 소비 합리화를 하며 아무 데나 자리를 깔고 앉아서 점심을 즐겼다.
빵을 먹고 있는데 어디서 나타난 갈매기가 자꾸 주변을 맴돌았다.
아니 분명 호수라더니 이 갈매기는 도대체 뭐지...
혹시라도 빵을 채갈까 하는 걱정에 갈매기를 한껏 경계하며 빵을 다 먹고 나자 갈매기는 날아갔다.
한입 주길 바랬나.
빵과 물을 사 왔는데 물을 다 마시고 나서 빈 병을 가만 바라보다 물을 떠볼까 싶어서 호숫가로 내려가기로 했다.
물 이름 자체가 "바이칼 물"이었기에.
천천히 걸음을 옮겼음에도 바람 많이 부는 날 호숫가로의 길은 돌이킬 수 있다면 돌이키고 싶었다. 후지를 마을에서 바이칼 호숫가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절벽을 꽤나 내려가야 하는데 등산화도 아닌 데다가 그냥 나이키 에어포스 운동화를 신은 나에게 바람이 강하게 부는 비탈길은 정말 무서웠다.
마치 해와 바람 동화에 나오는 나그네가 되어 바람이 나를 고꾸라지게 만들려는 듯 거센 바람이 온몸을 휘감았다.
바람이 너무 거세서 몸을 낮추고 싶은데 낮추면 내려가는 길을 보는 시야가 좁아지고, 그냥 내려가자니 바람도 불고 비탈길이라 길은 미끄럽고. 돌아갈까 싶어서 돌아보니 어느새 꽤 내려와 있어서 아쉬우니까 그냥 가봐야지 하는 마음에 열심히 호숫가로 내려왔더니 꽤나 볼만한 경치에 모험을 감수할만하다 싶긴 했지만, 내가 등산에 자신 있다! 하는 게 아니면 추천하고 싶진 않다.
바람 많이 부는 날, 절대 절벽을 내려가지 마시오-
비록 바람은 거셌지만 내려가는 동안 잠시 동안 날이 맑아져서 반짝거리는 호수를 감탄하며 바라보다 다 마신 물통에 물을 담아보았더니 꽤나 인스타 감성으로 사진이 나온 것 같다.
호수에 손을 담그니 매서운 얼음장 같은 물 온도와 손을 빼자마자 느껴지는 거센 바람의 온도에 손이 썰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내 체온만으론 덥힐 수 없을 것 같아 따뜻한 숙소에서 쉬고 싶단 생각이 간절했다.
5월 말의 바이칼이 이렇게 매서운데, 나중에 얼음이 꽝꽝 언 바이칼은 얼마나 추우려나.
궁금하지만 벌써부터 발가락이 얼어붙는 느낌이다.
다시 마을로 올라가는 길에도 바람이 정신없이 불어 이러다 고꾸라져서 목 부러질 것 같다 하는 생각이 들어 올라올 땐 시야 확보고 뭐고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왔다.
절벽가에 부는 바람이라 몇 곱절은 더 매서웠지만 그래도 바람 끝에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열렬함이 묻어나서 마냥 싸늘하진 않아 다행이었다. 이 와중에 춥기까지 했으면 울면서 올라왔을 테니.
절벽을 기어 올라오니 왠지 오늘은 호수로 내려가 볼까 하는 30분 전의 나 같은 생각을 가진 여행자들 몇 명이 다가오길래 고개를 절레절레, 내려가지 말란 뜻을 보여주고 마을을 천천히 둘러보며 숙소로 들어갔다.
알혼섬, 후지르 마을을 크게 한바퀴 걷다가 학생들이 항상 모여있는 곳이 학교라는걸 알아차리고 기웃거리다 보니 이 유일한 학교 건물도 직접 지은 것 같아 눈길이 갔다.
보기엔 초~중 까지만 여기서 학교를 다니는 것 같은데, 고등학교 부터는 이르쿠츠크로 가는건가.
그런 내가 지금 알 수도 없을 생각은 뒤로 하고 수제작된 학교 건물을 유심히 바라보다 보니, 어릴 적 읽던 동화책에서 본 내용들이 떠올랐다.
내가 어렸을 적 정말 좋아해 마지않는 동화 작가가 로얼드 달, 아스트린드 린드그렌, 그리고 로라 잉걸스 와일더 세명인데, 이 중 로라 잉걸스 와일더는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 태어난 작가의 자서전이라 동화책인 '초원의 집' 작가로써, 동화라고 하긴 뭐하지만 어쨌든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읽었었다.
1900년대 중반의 개척지 생활과 그네들의 달큰한 사랑 얘기나, 태풍이나 세금, 흉작 등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그네들의 모습, 그리고 직접 집을 짓는 얘기도 꽤 나왔다. 직접 나무를 썰고 못질하는 내용같은게.
그때는 이게 예전 얘기라 생각 하니 그저 옛날 얘기 같아 재밌게 봤는데, 2019년 현재에도 학교를 이렇게 지어서 쓰다니, 그게 기억에 남았다.
마을 여기저기를 천천히 둘러보다 오늘은 후지르마을에서의 마지막 밤이니 보드카를 마셔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슈퍼로 후다닥 가서 보드카와 안주거리를 사 돌아와 짐을 챙기며 마셨다.
약 일주일 정도 지내며 짐을 아무렇게나 두었으니 슬슬 짐을 싸야겠다 하며 보드카를 홀짝이며 방을 돌아다니니 먼지가 방안을 빼곡히 채우기에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니 그 사이에 고양이가 또 들어와서 놀아주는둥 짐을 싸는 둥 하다보니 달큰하게 술기운이 올라왔다.
빠짐없이 짐을 정리하고 나니 해가 어스름하니 지고 있었다.
하루종일 날이 흐리더라니 오늘은 일몰도 찌푸린 양 흐렸다.
식빵을 굽는 고양이를 무릎에 둔 후 창가에 턱을 괴고 Skott의 Mermaid를 들으며 호수를 한참 바라봤다.
정말 매력적인 공간. 이 곳을 오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에서부터 3일 반나절, 그리고 또 하루의 한 나절을 보내서 도착한 섬, 그리고 바이칼 호수.
오는데 들인 시간이 중요하지 않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내가 호수에 오기 위해 보낸 시간보다 이 호수를 바라보며 느낀 자연 있는 그대로의 넓고, 광활함을 짜릿한 황홀함은 여기오는데 들인 시간보다 몇 곱절은 더 나에게 남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여기오는데 들인 시간은 정말 별게 아니다. 올 가치가 넘친다. 이것보다 더 오랜 시간이 들었더라도 기꺼이 왔을 것 같다.
횡단열차에서 만난 할머니들이 열차에서 내리고 일주일동안 비가 온다는 예보 때문에 숙소를 취소하고 이르쿠츠크에만 머물러 계실꺼라 하셨었는데 일기예보가 틀려서 다행이지만 그 할머니들이 호수에 못 오신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혹시 어디서라도 만나게 되면 사진 찍은 것들 보여드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