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So loved Russians

29-05-19 시베리아횡단열차 2부 2일차

by 역마살아임더


열차가 어느새 아침이 되어 멈춰 잠에서 깼다.

전날 군인 애들이 향수 자랑을 할 때 손목에 발라봤던 향수 냄새가 은은하여 기분좋게 눈이 떠졌다.

보드카를 마신 덕분인지 눈은 떴지만 여기가 어딘지 잠깐 몽롱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무도 없었다. 이미 다들 열차에서 내린 후 인것 같았다.

KakaoTalk_20200202_230157891.jpg 빠-까!

아직 안내린 남자애가 안녕! 하며 열차에서 내렸다.

잘가라고 손을 흔들어준 후 시간표를 보니 노보시비르스크에서 한시간 가량 정차한다고 써있었다.


기지개도 켜고, 맑은 공기로 해장 할 겸 밖으로 나갔더니 잠이 확 깼다.

한시간이나 멈출 때 사람들은 열차 바깥 슈퍼에 가서 뭔가를 사온다고 했지만, 이미 갖고온 음식도 많고, 굳이 필요성을 못느껴 기지개를 켜고 걸었다.

전날의 소음과 음주, 만남이 환상 같았다.


KakaoTalk_20200202_230157891_01.jpg 그러고보니 난 왜 열차에서 내릴 때 카메라를 안들고 내렸었지..?


어느새 열차가 다시 출발할 무렵이라는 말에 정신 차릴 겸, 해장 겸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열차에 다시 타니, 전날 유라와 예고르가 누워있던 자리에 왠 애기가 탔다.



원치 않는 여행인지 눈물이 그렁그렁하며 칭얼 거리는 소리에 한숨 더 잘 생각이었던 나는 내심 반갑지 않았다.

전날 밤이야 술 먹고 나니 깊은 잠에 자느라 소음을 못 들었다지만,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었다.

다행인지 열차가 출발하고 나니 칭얼거리기는 하지만, 시끄럽진 않았다.




아침을 먹고 났는데도 향수냄새가 어디선가 났다. 손목 뿐만 아니라 내가 취해서 다른 곳에도 바른건지, 전날 밤 일이 생각나서 머리가 다시 울리는것도 같았다. 찐 러시아인이 마시는 보드카의 위력이란..


KakaoTalk_20200203_122901325.png 다히르의 향수. 소재를 아시는 분 있으면 말좀...!


내가 바른 향수는 다히르라는 남자애의 향수였는데, 그 애의 이미지와 향수 향이 너무 찰떡같이 어울려서 신기했다. 나도 언젠간 나에게 그렇게 찰떡같은 향수를 하나 찾을 수 있을까.


전에 인터넷에서 봤는데 누군가는 여행 갈 때마다 한가지씩 향수를 사서 여행지에서 뿌리고 다닌다고 했다. 나중에 어디서라도 그 향수 냄새를 맡으면 여행 갔었을 때 향수가 다시 떠올라서라고 했다.

그 글을 보고 면세점에서 뭔가를 사볼까 했는데 이미 가진 향수만 여섯개인데다가 내가 마음에 들어 했던 향수는 이미 단종이 되어, 몇년째 그 향수를 자극하는 향수를 찾고 있었다.

그 향수 뒷면에 써있던 성분을 일일히 찾아보며 같은 성분의 향수를 몇개나 시향해 보았으나, 그 성분 중에서도 뭐를 얼마나 넣느냐에 따라 다른 향이 났다. 같은 인풋을 넣었지만 모두 다른 아웃풋을 가진다. 느낌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향이다. 얼마나 들어갔느냐에 따라 다른 향이 나듯, 어디에 집중하고, 어디에 더 강점을 뒀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오고 다른 사람이, 다른 향이 나는 것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건너편 애기가 씬스틸러처럼 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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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까진 주변에 아기가 없었다. 조카들은 앳저녁에 쑥쑥 자라버린지 오래였고, 아직 친구들은 결혼 하지 않아서 아기 브랜드 매장 앞을 지나가다 발견한 마네킹들은 하나같이 배가 뽈록하길래 궁금했다. 근데 저 건너편의 아기를 보니 그 마네킹들은 고증이 상당한 것이었다!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심지어 ‘So Loved’라니.

아기가 귀여워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 엄마와 아기가 낮잠을 자기 위해 자리를 폈다. 뭔가 이제까지 열차를 탄 사람들은 나처럼 장거리를 가는지, 열차에서 지내기 위해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탔는데 저 아기와 엄마는 가볍게 탄 데다가 이불도 신청하지 않은걸 보면 그다지 멀리 가진 않는 것 같았다.



자라는 낮잠은 안자고 건너편의 나를 보고 연신 웃는데, 어떻게 모른척을 해요.

심장이 마구 부서진다 부서져.





어느새 열차는 다섯시쯤 되어 움스크에 도착했고, 아기는 엄마와 내렸다.

아쉬움에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슬그머니 따라내렸는데 열차 바깥엔 아기 아빠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에게 안겨 가는 모습에 러시아에서 겪은 안녕 중 가장 아쉬운 안녕을 했다.

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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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내린 후 열차는 다시 출발했다.


아기 엄마와 아기가 떠나는 모습을 보다보니 정말 일상의 한 모습이구나 싶었다.

당연히 침대형 이다보니 몇날 며칠을 떠나는 사람들만 기차를 이용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몇시간만에 열차에서 내리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가장 오래 타는 경로가 서울에서 부산으로 무궁화호를 타고가는것 일텐데.

멀리 가는 이들을 보니 문득 러시아에서 400km는 먼 거리도 아니라던 러시아인들의 말이 생각났다.

러시아에 약 보름 정도를 지내다보니, 이 땅의 끝은 어디일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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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비행기만 타고 해외여행을 했었는데 이렇게 땅들이 연결되어있는걸 내가 직접 경험하고 있으니 걸어서 세계 여행 한다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도전인 것 같았다. 지구는 둥그니까 걸어나가다보면 다들 만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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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가 출발하는걸 보며 저녁을 먹어야겠다고 밥을 꺼내 물을 붓고 자리에 돌아와서 기다리는데, 창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번 더 말하지만 나는 해외 여행이고 뭐고 하면서 비가 온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바이칼 호수가 있는 지역을 들어갈 때도 할머니들은 일주일동안 비온다 해서 취소하셨지만, 나는 잠깐 빗방울이 떨어졌어도 오히려 해가 쨍쨍한 하늘을 실컷 만끽하고 왔는데, 이렇게 비가 오다니. 부어놓은 음식은 뒷전이고 비 구경을 하는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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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부산은 비가 오는데 서울은 비 안오는 경우가 허다할테지만, 내가 지금 열차를 타고 있고 열차가 계속 움직이는 중이라 그런지 비가 오는걸 얼마나 봤는지 어느새 비가 멎었다. 그리고 어둑어둑 하던 하늘에 갑자기 해가 다시 나타났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르츠쿠츠까지는 시차가 한두시간 정도로 밖에 나지 않았지만, 이제 모스크바와 한국만큼, 여섯시간의 시차가 생기기 시작하는 때 인가보다. 30분 전에는 이미 해가 진 어둑한 들판을 달렸는데 갑자기 다시 해가 나타났다.



갑자기 여섯시간의 시차가 생기면 어떡하나, 몸에 부담이 가는건 아닌가 싶었는데 걱정과 달리 비행기를 타고 갑자기 6시간의 시차 속으로 뚝 떨어지는게 아니라 한시간이 빨랐다가 느렸다가, 두시간이 느렸다가 빨라졌다, 어느새 세시간씩 차이가 나기도 하고. 판타지 소설에서 묘사하는 순간이동의 순간에 있는 것 같았다. 굳이 말하자면 시공간의 주름 구석 구석에 내가 스며드는 중 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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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해가 지는것만 두시간을 본 것 같다. 보통 노을이 지는 것은 길어야 한시간 남짓 정도로 기억하는데 이 드넓은 평야를 달리는 동안은 해가 두시간동안 엇비슷한 높이에서 해가 지는걸 볼 수 있었다.

이것도 시베리아횡단열차에서 볼 수 있는 묘미가 아닌가 싶었다.

자연이 그 계절동안 (나의 경우 여름)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예쁜걸 열차에 앉아서 천천히 볼 수 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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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시 쯤에 건너편 아기가 내린 자리에 한 가족이 탔다.

열차에 타서 스도쿠를 하는 이들은 힐끔거리며 날 구경했고, 나도 그들을 구경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열차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는 이 긴긴시간동안 책을 많이 본다. 아무래도 데이터가 안터지는 곳이라 그런가 싶다가도 아날로그 책을 들여다 보는 이들을 관찰하고 있자니 내가 너무 빨리빨리의 나라에 살고 있었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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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대는 유튜브 세대라고도 불리는데 또 거기서 발전하여 (?) 유튜브 보는 시간을 못견뎌하고 차라리 글로 써져있어서 필요한 정보를 눈으로 훑는걸 좋아한다고 한다. 비단 내가 나는 왜 유튜브 보는 시간도 못견뎌했을까 하고 생각할게 아닌 하나의 트렌드라고 생각하니 나만 그런게 아니군 하는 동질감과 그런 사람의 대표 유형인 내가 이 시베리아횡단열차에 타니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느끼고 모든걸 관찰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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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관찰하는 나를 관찰하는 할머니도 있었다!

이 할머니는 화장실 바로 앞 침대에 계신 할머니셨는데, 누구랑 같이 탔는진 모르지만 모든 순간동안 누워계셨는데 유독 내가 지나갈 때마다 끈질길 정도로 쳐다보셨다. 러시아 사람들을 대할 땐 초면에 웃으면 오히려 실례라는 말을 듣고 난 다음부터는 웃지 않고 무뚝뚝한 얼굴로 지나가는데 하도 보시기에 웃겨서 한번 웃어드렸더니 고개를 돌려버리셨다.

비웃는거 아닙니다...




그렇게 열차안의 사람들이 서로를 관찰하는 새 해가 완벽하게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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