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5-19 시베리아횡단열차 2부 3일째, 합법적 음주
아침에 눈을 뜨니 예카테린부르크였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새벽 다섯시인데, 시차가 네시간이라고 뜨는걸로 봐서는 한국 시간은 아홉시인것 같았다. 그래서 잘만큼 잤다 생각해서 몸이 스스로 나를 깨운건가.
하지만 내리거나 하지않고 다시 잠을 자기로 했다.
이것도 생각 해 보면 열차를 타고 달라진 점이었다. 계속해서 잠을 청하고, 잘 잔다는 점.
우리 부모님의 말을 빌면 나는 정말 잘 일어나서 깨우기 편한 딸이었다. 아침에 깨울 일이 있어 내 방문만 열어도 잠에서 깨는 잠귀가 밝은 딸. 그리고 한번 깨워놓으면 다시 잠들지도 않는다. 그에 대한 반사효과로 나는 잠을 깊게 못잤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니, 특히나 이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있자니 나는 잠이 깨서 핸드폰으로 바깥이 어딘지 확인도 하고 증거사진(?)도 찍어놓을 정도의 행동도 하지만 다시 잠든다. 한국에서라면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내가 잠에 깬 다음에 뭔가의 행동을 하고도 잘 잠드는 경우는 가위 눌렸을 때였기 때문이었다. 왜였을까. 늘 그렇게 잠을 못자는 나를 보고 남자친구와 가족들은 모두 걱정했다. 시베리아횡단열차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탈텐데 잠을 어떻게 자겠느냐고. 실제 타보니 잠이 너무 쏟아져서 문제이던걸요.
그리고 덧붙이자면, 열차에서 그렇게 아무때나 잠이 쏟아질 때 잘 잤더니 한국에 와서도 잠을 더럽게 잘 자는 사람이 되었다. 그동안 먹었던 수면 보조 영양제도 끊게 되었었다. 열차 만세!
자리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고 뭐하지 하며 멍때리며 주변을 둘러보다 지루해져 핸드폰의 앨범을 정리하였다.
나는 사진 찍는걸 상당히 좋아하고, 잘 찍는다고 스스로가 생각 하는 편이고, 예대생인 남자친구에게 잘 찍는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지만 잘 모르겠더라. 그래서 무작정 많이 찍는다. 좀 더 tmi를 뿌리자면, 핸드폰 용량도 256기가인데 아이클라우드 용량도 200기가로 신청했는데도 사진 용량만 100기가에 육박한다. 다른 어플을 깔지도 않고 게임도 하지않지만 앨범 용량으로 핸드폰이 꽉 차는 삶. 혹시 아시나요.
한참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보름 조금 넘게 여행했지만 이번 여행은 너무 계획 없이 그냥 발길 닿는대로 돌아다니기만 해서인지, 감상은 남아있으나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많이 없는 것 같았는데 의외로 그 길을 지나다닌 기억들과 내가 지나친 모든 순간이 사진을 통해 나에게 다시 돌아왔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건 뭘까. 그 피사체를, 그 장면을 마주한 내가 느낀 감정을 타인에게 잘 전달하는게 잘 찍는걸까. 그래서 개인적으로 사진은 그림을 비롯한 다른 예술분야와는 다르게 참 감정을 표현하기는 어려운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기술이 부족해서일수도, 지식이 짧아서 일 수도 있지만 내가 느낀 감정을 바로바로 표현해내기는 어려운 분야같다. 내 감정과 맞는 피사체를, 그런 피사체를 마주하는 순간이 바로바로 찾아오진 않으니까.
한참 누워서 뒹굴 거리며 핸드폰 앨범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 역에 멈췄다. 조금 심심했던 참이기에 나가서 기지개도 펴고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 본 사람들이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 한 다음부터 모스크바로 갈수록 편의점에서 파는 음식 값도 다르다는 걸 얘기했는데 맞는 말 같긴 했다. 알혼섬에서나 이르쿠츠크에서 먹었던 아이스크림은 20루블 정도로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기억하는데 어느새 30루블을 훌쩍 넘겼다.
서울 물가 비싼거랑 같은 이친건가.
다시 열차에 들어와서 러시아에 놀러왔으니 러시아사를 알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핸드폰에 다운 받았던 러시아사 이북을 읽기 시작했지만 블라디보스톡~이르쿠츠크 구간 때 읽었던 책과는 달리 역사 책이라 그런가, 이상하게 글이 안읽혔다. 너무 머나먼 얘기라 그런가. 그렇다고 고르바초프 때 얘기를 읽어도 지루하긴 마찬가지였다. 한참 여기저기를 눌러보며 흥미로운 구간을 찾다가 포기하기로 했다.
그냥 나는 러시아사에 대해 아는건 아나스타샤와 차르를 비롯한 봉건제도까지만 아는게 좋겠다 싶었다.
그래도 흥미로운 부분은 하나 발견했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표트르대제가 달력을 개편하기 전까지 1월은 9월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야지 선악과가 익어 뱀이 아담과 이브를 유혹했을 것이라고. 한번도 생각 해 보지 않은 접근법이라 그런지 매우 신박했었다. 당연히 새해는 1월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역시 사회의 모든것은 수많은 합의에 의한 결과구나 하는 깨달음과 건너편의 가족들을 보다 든 생각이 잔잔한 내 일상을 풍부하게 했다.
초면엔 웃지않는 러시아인들에 대해 생각 하면, 우리네가 받아들이기로 흔히 웃지 않는 사람은 무뚝뚝한 사람, 차가운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이들 기준으론 그렇지않은걸 생각하면 감정을 느끼는 표정도 학습된게 없잖아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초면에 웃지 않는건 문화적인 차이인게 더 맞지만. 괜시리 튄 생각의 끝은 여기를 짚었다.
아기들이 좋은것, 나쁜것 구분 없이 일단 울고 보는걸 보면 도대체 감정이란건, 표정이란건 학습된 것일까 아니면 본능일까.
그런 쓸데없을 수 있는, 답 없는 질문에 대해 혼자 골똘히 생각 하는데 열차가 또 멈췄다.
생각을 오래했더니 괜히 술도 마시고 싶어지기도 하고. 이번에 열차가 출발하면 혼자라도 열차칸에 가서 술을 마셔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번 열차는 매우 감사하게도 약 두어칸 정도만 지나가면 식당칸이 나왔다. 식당칸에 도착하니 이미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들 사이에 혼자 자리를 잡고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버드와이저라는게 좀 신기했다. 당연히 자국 맥주가 있을거라 생각 했는데. 아니 어느 나라 맥주가 있더라도 왠만하면 미국 맥주는 없지 않을까 했는데 이번 열차에서는 온니 버드와이저만 있었다.
약간 쿠바 사람들이 미국 제품은 안사려고 애쓰지만 결국 핸드폰은 아이폰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코카콜라를 은근히 마시는거랑 비슷한건가.
왜 술을 마시다보면 술과 안주가 좋은 타이밍에 둘 다 떨어지는 경우가 없는걸까.
술이 남으면 안주가 없고, 안주가 남으면 술이 없고. 나름 균형감 있게 마신다 생각 했는데 왜 늘 안주와 술은 서로
그래서 혼자 두 캔이나 마신 후 비척비척 자리로 돌아와 창문을 바라봤다.
어느새 해가졌다.
자리에 돌아오니 내 뒷자리에 왠 남자애가 탔다.
내 나이또래로 보여서 영어를 할 줄 아는가 관찰하고 있었는데 (아 이래서 군인 애들이 날 바라보고 있던건가) 상당히 마마보이였다. 맞는진 모르지만 남자애의 윗침대엔 남자애 엄마가 타서 사사건건 간섭하고 밥도 먹여주시고, 책도 쥐어주시는 모습에 말 걸기로 한 생각을 접기로 했다.
모스크바까지 가는걸 보면 유학을 가는것 같은데, 이렇게 마마보이라니. 앞으로 열심히 살아라 임마....
말을 걸고자 했던 마음은 접고 그냥 자리에 누워 창 밖을 보기로 했다.
어느새 내일 낮이면 드디어 모스크바에 도착하는데,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의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섭섭했지만 내가 섭섭하거나 말거나 열차는 계속 모스크바를 향해 점점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