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프리비엣! 모스크바

31-05-19, 시베리아횡단열차 안녕, 그리고 모스크바 1일째

by 역마살아임더


드디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내리는 날.

블라디보스톡에서부터 여기까지 거의 만킬로미터를 달리며 모스크바에 도착하다니. 감격스러웠다.

슬슬 모스크바에 도착할 때가 되니 열차에서도 핸드폰이 터지기 시작했다.

열차를 타고 지낸지 약 일주일동안 열차안에 누워서 핸드폰이 터진 적은 정차역에 멈출때, 그리고 출발한지 2-3분 이내 뿐이었어서 그런가 누워서 남자친구와 가족에게 모스크바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연락하는게 감탄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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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보통 사람들의 후기와는 다르게 내가 탔던 99호차는 원래대로면 가장 후진(?) 열차여야 마땅하나, 의외로 자리마다 콘센트도 있는 자리였다.

그래서 핸드폰을 쾌적하게 충전할 수 있었는데 내 앞자리에 탄 마마보이 남자애가 갑자기 내 자리에 오더니 핸드폰을 충전시키는게 아닌가.

어이없어서 뭐야? 하고 쳐다봤는데, 내 건너편에 앉은 가족에게 다가가 핸드폰 어디에 충전하냐 물었고, 그들은 쟤처럼 (나) 자리에 있는 선반에 보면 있다고 가르쳐 줬는데 내 콘센트에 갖다 꽂는게 아닌가.

뭐 이리 멍청한 애가 모스크바로 유학가서 혼자 살겠대....어이없어서 건너편 가족을 쳐다보니 그들도 나를 보고 마마보이를 보고 어이없어 했다. 조만간 내리는데 열내서 무엇하리...하며 옷을 갈아입고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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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내릴 때가 되서인지 차장이 티켓도 갖다주러 와 진짜로 내가 모스크바에 도착했구나 싶어 감탄했다.

9,288 킬로미터나 내가 건너왔구나.

건너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고 재밌는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과연 아담은 모스크바에서 볼 수 있을까 기대도 좀 되고. 돌이켜보면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일주일. 아쉬움이 들었다.

아쉬움중엔 로망에 대한 아쉬움도 있는 것 같다. 그 불충족된 로망은 보통 사람들이 “시베리아횡단열차”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설원을 가로지르는 열차에 대한 로망이 채워지지 않아서 생기는 것 같다. 하지만 5-6월의 녹음이 푸르게 우거지는 들판을 가로지르는 경험도 남들이 해보지 않은 경험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면,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에 또 장기로 여행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꼭 겨울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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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에 열차에 탄 아저씨는 예고르가 올려준 내 짐을 내려주시고는 내 맞은편 자리에 주저 앉으시곤 같이 모스크바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어느새 열차가 멈추자, 심장이 터질듯 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내가 세상의 대륙중 하나를 건너왔다는게 실감이 나서일까. 괜히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며 사람들이 열차에서 내리기를 기다렸다.




러시아 사람들도 한국인들 만큼이나 성격이 급하다더니, 모든 침대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열차가 멈추지도 않았는데 내리기 위해서 줄을 섰다. 내 칸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내렸다.


안녕, 시베리아

안녕, 99호차 16호실 39번 침대



모스크바의 날씨는 흐렸다.

뭐 열차에서 확인 해 보니 일주일 내내 비가 온다고 되어있었기에 개의치 않아했다.

숨을 한껏 들이마셔보았다. 미세먼지가 없는 시베리아가 몰고온 서늘함과 5월 말의 뜨거워지는 공기가 함께 폐를 한바퀴 돈 후 나갔다.

프리비엣! 모스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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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낑낑 거리며 끌고 나가다가 생각나서 다시 뒤돌아서 돌아왔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찍었던 시베리아횡단열차 기념비를 찍어야지 하는게 기억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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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블라디보스톡 기념비 우, 모스크바 기념비


시베리아 횡단열차 기념사진 겟-!




이르쿠츠크에서도 그랬듯, 내리자마자는 여러 사람과 같이 자는 숙소가 아닌 일인실의 호텔을 예약했다.

기차역 바로 뒤에 있는 act호텔이었는데, 유럽권에선 보기 힘들게도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비록 방은 만족스러운 컨디션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4일간 꼬질꼬질해져 있던 내가 몸을 씻고 옷을 간단하게 빨기엔 좋은 컨디션이었다.

182836740.jpg 사진출처: 부킹닷컴 АСТ Отель

몸을 씻고 나오자마자 친구들에게 보내는 엽서를 보내고 간단하게 모스크바 구경에 나섰다.

약 2주 정도 보고 지냈던 러시아의 풍경이 다소 러시아의 시골 스러웠다면 모스크바는 모스크바라는 이유로 수도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서울이랑은 다른 건물 양식으로 내가 서울이 아닌 모스크바에 있구나 하는게 실감 나기도 하고.


KakaoTalk_20191120_093121471_08.jpg 우체국에서 나오자마자 발견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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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은 러시아 트레이드마크가 아닐까 싶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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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도 아이스크림 먹으며 시작~



주변을 한바퀴 돌아본 후, 모스크바하면 생각나는 테트리스 성당과 붉은 광장을 둘러볼까 하며 지하철 역에 들어갔다.

KakaoTalk_20200210_143726560_14.jpg 해리포터 마법부로 가는 입구같이 생겼지만 지하철 역입니다.


KakaoTalk_20200210_151211221.jpg 트로이카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 썼던 3일권


모스크바에서는 지하철 이용권 3일치를 우선 구매해서 썼는데 신기하게도 이 종이쪼가리로 버스 트램 지하철 등등 모든걸 탈 수 있었다. 의외로 내가 지하철이나 트램은 먼 거리 갈때만 타고 매번 걸어다닌다는걸 기억 하고 난 다음부터는 트로이카를 사서 충전하고 다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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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쪼가리를 찍고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길은 신기했다.

모스크바의 지하철역들은 공습에 대비하여 매우 지하에 지어져있다고 하더니, 에스컬레이터 끝이 보이질 않았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성격이 급한걸 감안한건지, 이제까지 타 본 에스컬레이터 중 가장 속도가 빨랐다.

홍콩 에스컬레이터 속도가 제일 빠른 줄 알았더니, 러시아 앞에서는 아무도 명함을 못내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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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지하철이 엄청 빠른 속도로 왔다. 열차간의 간격이 매우 짧은건지 열차 하나를 놓쳤다 해도 문제 될 일 없을 정도. 스크린도어가 없어서 그런지 다소 위험하긴 했다. 스크린도어에 익숙해진 한국인은 지하철이 들어올 때마다 세발짝은 뒤로 물러났었다. (ㅋㅋㅋㅋ)


스크린도어없이 무섭게 도착하는 모스크바 지하철






성 바실리 성당이 있는 곳 까지는 매우 가까워서 금방 도착 했고, 내려서 조금 걸어가다 알았다.

바실리 성당 근처엔 붉은광장과 굼 백화점이 같이 있고, 관광지가 다 몰려있단 것을.

아담 미안....ㅎ....나 혼자 왔다 야...ㅎ....바실리 성당만 보려고했는데 다 볼줄은 몰랐다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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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광장을 가는 길에 마주친 모스크바의 단면


바실리 성당이 보이자 괜히 심장이 다시 설렜다.

모스크바, 러시아 하면 바로 생각나는게 이 건축물이라 그런가. 바이칼 호수를 처음 봤을 때 처럼 심장이 두근 거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터키에 가는 길에 경유했던 모스크바에서 눈이 너무 와 비행기가 결항되어 발이 묶였을땐 당연히 바실리 성당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봤고, 기억나는건 허벅지까지 쌓이는 눈 뿐이었는데 이렇게 약 15년 정도가 지나 다시 모스크바에 도착해 바실리 성당을 보니 이상하게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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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찍은 사진으로 수없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 눈으로 보는건 다르다.

이걸 만들고 난 다음에 너무 예뻐서 건축가의 눈을 뽑았다고 하는데, 제대로 실명은 안됐다는 말과 실명 됐다는 말이 많을 정도로 아름다운 건축물이었으나, 앞에 사람이 너무 북적거려서 다가갈 엄두가 안났다.

랜드마크란 이런건가. 어차피 오늘은 첫날이고 일주일이나 있을테니, 다음에 다시 오기로 하고 굼 백화점 쪽으로 발을 옮겼다.



분명히 내가 도착한 날은 금요일인데 금요일이라 그런가 붉은광장과 바실리 성당 앞, 굼 백화점 앞마당에는 잔뜩 뭔가의 놀이마당(?)이 준비 되고 있어 사람이 많고 혼잡했다. 조용한 열차에서 몇날 몇일을 지내다가 갑자기 이렇게 복작복작한 사람들을 보니 급 피곤했다. 백화점안에 들어가면 뭔가 있겠지 하며 들어갔는데, 백화점 안은 더 복작거렸다.


KakaoTalk_20191120_093121471_13.jpg 알록달록한 굼 백화점 내부


모스크바 굼 백화점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러시아가 이렇게 잘 사는 나라라는걸 보여주기 위한 시설이라 그런가, 매우 화려했다. 파주 아울렛에 있는 것 처럼 널찍한 2층 건물에 빼곡히 명품 가게들이 들어차있었다.

만국박람회라도 온 양 알록달록한 가랜드가 여기저기 걸려있고, 유리 천장에서는 어느새 나타난 햇빛이 아낌없이 들어왔다. 딱히 모스크바에서는 쇼핑할 생각이 없었기에 대충 둘러보다 남동생이 추천한 굼 백화점에서 파는 젤라또를 먹었다. 젤라또 가게 직원이 러시아어밖에 못해서 약간 당황했다. 수도에 있는 큰 백화점인데 어쩜 이러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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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벙벙해 하자 주변에 있는 영어를 할 줄 아는 러시아인들이 도와줘서 젤라또를 먹고, 다시는 굼 백화점에서 뭔가 안사먹어야지 하고 다짐했다.

그래도 아이스크림은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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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열차에서 내렸을때와는 달리 모스크바에서는 언제 그랬냐는듯이 해가 매우 반짝 거렸다. 더워서 긴바지를 못입겠다 싶을 정도. 어느새 땀이 줄줄 나고 있었다. 하지만 백화점 내부에서는 에어컨을 틀지 않았고, 차라리 나가서 바람을 쐬는게 낫겠다 싶어 밖으로 나왔다.

뭔가 축제를 준비하는 듯한 러시아인들을 지나치며 나도 모르게 축제 분위기로 신나기 시작했다.


KakaoTalk_20191120_093121471_14.jpg 같은 사진 중복이 아니라 이건 필름 걤-성으로 찍은 또 다른 사진!


주말이라 그런가.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마다 웃음이 가득하고 그네들의 가족과 시간을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들을 보고 웃으며 발이 닿는대로 걸었는데 어라, 이번엔 볼쇼이 극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의도한건 아닌데 이렇게 볼쇼이 극장까지 한번에 다 봤으니, 모스크바에서 이제 뭘 봐야하나 싶어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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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군데에 다 모여있어서 모스크바보단 상트가 더 볼게 많다고 동생은 그런걸까.

예상치 못하게 만난 볼쇼이 극장과 그 웅장함 앞에 잠시 머뭇거리며 바라보다 내가 여행 할 때에는 볼쇼이 극장에서 하는 발레 공연이 없어 예약을 못한게 못내 아쉬웠다. 다른 발레 공연을 하는 장소는 많았지만, 기왕에 보는거 볼쇼이 극장에서 하는 발레 공연이 보고싶었는데. 그게 너무 아쉬웠다. 이것도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같이 다음번에 와서 즐길거리로 남겨둬야지 하며 마저 발걸음을 옮겼다.


KakaoTalk_20191120_093015839_08.jpg 굼백화점 옆길로 들어가면 이렇게 가게가 많습니당


볼쇼이 극장 옆엔 굼백화점 별관이 있었고, 그 길을 따라 올라가면 음식점과 가게들이 즐비한 거리가 나온다.

그 거리를 걸어 올라가는데 믿기지도 않게 시간이 벌써 일곱시 반이었다.

하지만 해는 아직 오후의 그것이었다. 이렇게까지도 밝을 일인가. 모스크바에 무사 입성한 기념으로 노천에 있는 가게에서 밥 먹으며 축배를 들어야지 싶어 노천에 자리를 내준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보니 기차에서 만났던 아담 친구인 아굴라가 추천한 스시케밥이 보였다.


이거 먹어봤냐며 몇번을 물어본 아굴라가 생각났다. 지금 먹어볼께 아굴라...ㅎ....

그리고 러시아의 전통 수프인 보르쉬와 맥주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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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시케밥은 도대체 샤슬릭과 뭐가 다른거였을까


모스크바 무사입성 기념으로는 안성맞춤인 한상이었다.

그리고 노천에 있어서 그런지 모스크바 사람들의 금요일 저녁 구경하기에도 안성 맞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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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 혼자 앉아 씩씩하게 밥먹는 나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이들 쳐다봤다. 나도 그네들을 구경하고, 그들도 나를 신기하게 보고.


한국에서는 약간 ADHD 끼가 있는 나는 음식점에서 밥을 먹거나 하면 주변 테이블에서 하는 얘기를 듣고싶지 않아도 귀에 꽂힌다. 이런 저런 얘기를 들으며 저 테이블은 어떤 사연인지, 어떤 관계인지 최근 어떤 일이 있는지 까지 줏어듣는데, 아예 전혀 모르는 언어속에 갇히니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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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빵빵해진 배를 두드리고 있자니 어느새 해사 졌다. 해가 진 시간은 아홉시 반.

백야의 시간을 처음 겪어 신기했다. 밤 9시에 해가 지다니. 그리고 올려다본 하늘은 너무나도 코발트 블루여서 신기했다. 가시거리도 매우 넓고. 미세먼지 없는 깔끔한 밤하늘을 본게 얼마만이더라.



슬슬 아홉시도 넘었고 해도 졌으니 숙소로 돌아가려 지하철 역을 찾아 가는 길에 만난 모스크바 사람들의 손에 꽃을 심심찮게 발견 할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부터 느꼈고, 아까 붉은광장에서도 본 꽃의 가격이 매우저렴했던걸 생각 하면 이 나라는 꽃 가격이 매우 저렴했고,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서로에게 꽃을 많이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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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우리 아빠가 왜 그렇게 꽃을 자주 사들고 집에 왔는지 이해가 갔다.

아빤 러시아를 퍽 좋아했다. 어렸을 적부터 아빠는 러시아를 그렇게 자주 가셨더랬다. 마치 내가 대만을 오지게 좋아하듯. 툭하면 러시아로 여행을 떠나셨고, 러시아 예술과 문학을 사랑했다. 그리고 아무날도 아닌때 꽃을 사오는걸 좋아하셨다.


문과 감성의 아빠와 달리 이과감성인 엄마는 약간 심드렁해 하셨지만 (ㅋㅋㅋㅋㅋ)

아빠가 왜 그렇게도 꽃을 자주 사왔는지에 대해 갑자기 러시아인을 보고 깨달았다.

이 사람들을 보고 배운거겠지.

은근한 아빠의 로맨틱함이 보였다.

모스크바에서의 첫날.

너무나도 러블리한 모스크바의 모습에 폭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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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첫날밤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