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방금 내가 당한거 차별? 어 인종~

02-06-19 모스크바 3일째

by 역마살아임더
해가 반짝 거리던 아침


전날 너무 돌아다녔어서 그런지 꿈도 꾸지않고 푹 잠이 들었다. 일어났더니 이미 같은 방을 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가거나 막 나갈 준비중이었다.

바로 일어나지 않고 침대에서 느지막히 일어나서 천천히 씻고 아침을 꺼냈다.

오늘의 아침



전날 슈퍼에서 사다놓은 납작복숭아와 요거트로 간단하게 아침을 한 뒤 나오자 어느새 오후 한시가 다되어갔다.

내가 이제까지 여행하면서 이렇게 천천히 숙소에서 나와본 적이 있었나. 게다가 나온 다음에 뭘하지 고민하며 지하철 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가 놀랐다. 내 숙소에서 걸어서 굼백화점까지 갈 수 있구나.


해가 반짝 거리던 2일 아침



오늘 뭐하지 하고 고민하는데 길거리에 세워진 입간판에 러시아식 팬케이크를 브런치로 판다는 문구를 보고 멈췄다. 러시아 팬케이크, 블린을 먹어볼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난 이 가게를 들어가본걸 대 후회한다.

여행하면서 피부로 직접 겪은 처음이자 마지막 인종차별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가게에 들어가 메뉴판을 보고 브런치 메뉴를 시키자 브런치 시간이 지났다고 되어있었다.

당시 시간은 오후 한시로, 브런치 메뉴는 오후 두시까지 된다고 분명 적혀있었다.

그 문구를 가리키며 왜 안되냐고 물어보자 설명은 하지않고 안됨. 여튼 안됨. 식으로 말하고는 사라졌다.

어차피 브런치 세트는 커피와 블린이고, 나는 커피를 안좋아하니 블린과 콜라를 시켰다.

그리고 블린을 갖다 줬는데 밀가루만 줬다.

밀가루만 주길래 소스는 없냐고 물어보자 갑자기 구글 번역기로 딸기, 살구, 블루베리, 라즈베리 등을 중국어로 쳐서 보여주길래 어이없어서 웃었다. 어이없어 웃고는 딸기를 중국어로 말해주었더니 못알아듣길래 영어로도 다시 말해줬더니 연신 모르겠다는 표시를 하더라. 그래서 화가나 딸기를 똑같이 번역기에 쳐서 보여주었더니 가져다 주었다.


어렵게 먹은 블린과 딸기잼


이미 나온 블린이 무슨 죄겠어. 블린을 빠른 속도로 먹고는 자리를 떴다.

너무 기분이 나쁘고 얼굴이 빨개질정도로 화가 났다. 뭐 아시안같이 생겼으면 다 중국인이라는거야 뭐야 그럼 나도 넌 서양인인데 왜 영어 못해? 해주고 싶더라


씨익씨익 거리며 자리를 떠 걸어가자니 스타벅스가 보였다.

한국인의 영혼의 고향이라는 스타벅스라니. 오랜만에 보니 반갑기도 해서 스타벅스에 들어갔고,

뭔가 억울한 마음에 이번엔 한국어로 주문할테다! 물론 러시아어로 뭐라고 읽는지도 알아둘꺼고! 하고 다짐을 했는데, 나를 보자마자 파트너는

“주문 하시겠어요?”

라고 물었다.

순간 분노가 사라지며 오히려 차분해졌다.


내 영혼의 고향 스타벅스


그러더니 내 이름까지 친절하게 적어준걸 보고는 아예 화가 다 풀려버렸다.

그래, 이런 사소한 (?) 일로 화내기에는 앞으로 남은 내 여행이 많고 더 좋은 기억을 남길 기회가 더 많은걸.

다만 아쉬운건 영어로는 이런 인종차별을 당할때 너 정말 인종차별주의자구나! 라고 대응할 수 있는데 그럴 수 없다는 점? 러시아 사람들 중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손에 꼽었던걸 생각하면. 매번 이런 일을 더 당해야하는게 억울했지만 어쩌겠는가. 그냥 다녀야지. 하지만 저 가게는 다시는 안갈것 같다.


스타벅스 덕분에 기분이 한껏 풀려서 커피를 마시며 어딜가지 생각하다가 푸쉬킨 미술관과 어제 갔다가 까인(?) 구세주 성당을 가봐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마침 긴바지를 입고 나온 김에.


날이 좋아서, 해가 좋아서, 완벽했던 산책


걸어서 약 1킬로미터 정도를 걸어가야한다고 구글맵에 떠있었지만, 지하철 역을 찾아가는 것 보다는 그냥 걸어가고 싶었다. 전날 매우 쨍쨍해서 반바지에 반팔까지 입을 더위였다면 오늘은 그럭저럭 시원하고 구름도 많이 껴서 모스크바 거리를 즐기고 싶었다.



외국인이다보니, 게다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의 말이다보니 사람들을, 거리를, 바람을, 빛을 관찰할 기회가 더 많았다. 이상하게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 곳에 가면 사람들의 눈치가 보였다. 반대로 내가 못알아듣는 말을 하는 곳에 가면 사람들의 눈치도 보지않고 자유로워졌다. 이래서 아무것도 모르면 더 용감하다는건가. 가만히 올려다본 하늘이 너무 예쁘고, 좁은 길을 좋아하는 나에게 모스크바 곳곳에 있는 좁은 길들이 나에게 말을 걸었고 쉼을 주었다.



아무래도 길 위에 있을때 나는 가장 스트레스가 없고 사람들을 쳐다보고, 길을 관찰하는게 가장 즐거웠다. 이런 나를 보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행 가면 얼마나 신경쓸게 많은데 생각 정리를 하러 여행을 가냐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번 여행은 나에게 생각정리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여행인 것 같다. 모르는 말 가운데서 자유로워지니까.



구 아르바트 거리를 걸어, 주택가를 지나 작은 공원을 지나자 푸쉬킨 미술관이 나왔다.

푸쉬킨 미술관엔 여러 거장의 예술 작품이 있다길래 기대하며 들어갔건만....



지금 신관이 공사중이고, 그 신관에 유명하다는 작품이 많기에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전시 구경을 했다.

티켓을 사고 입장하는 나를 보고 빙그레 웃던 경비 아저씨는 미술관에서 사진 찍어도 된다고 알려주셨다. 그게 너무 신기해서 정말요? 라고 하자 그렇다고 빙그레 웃어주셨다.

한국이라면 상상도 못할일인데. 안되는거 아니에요? 하면서 반신반의 하며 들어가서 마음에 드는 사진을 발견하자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내 옆의 아줌마도, 그 옆의 할머니도, 저쪽 코너의 할아버지도 다들 마음에 드는 그림을 사진으로 찍었다. 나중에 자신의 예술작품에 참고할 수도 있겠고, 나처럼 추억하기 위해 찍을 수도 있겠지?

한국이랑 다른 전시 모습에 신기했다.



덕분에 글을 쓰기 위해 앨범에서 쭉쭉 올려보다가 마음에 들었던 사진들을 다시 보게되어서 좋았다.


어마무시하게 넓은 미술관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갑자기 아빠가 생각났다. 평소 러시아를 매우 좋아하던 우리아빠는 사업차 러시아에 자주 들르셨었고, 러시아에서 사왔던 전시도록을 언니와 함께 누워서 구경했던것 같다. 푸쉬킨 박물관을 관람하다가 그 전시도록에서 봤던 그림을 실물로 마주할 때가 있었는데 그냥 도록 사진으로 봤을때만 해도 예쁘다 생각했는데 미술관에 와서 붓터치 하나하나까지 보니 여기가 미술 예술의 대국이라는게 새삼스럽게 피부에 닿았다.


그리고 이 넓은 공간에 상시 전시로 이런 정도의 작품들을 볼 수 있고, 낮동안에 미술 작품을 보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걸 보고 예술 대국의 사람들에게는 이게 전시를 보러 온다! 가 아닌 일상일 수 있겠다 싶었다. 예술이 일상인 삶은 어떤걸까.




미술관에서 나오니 블린과 커피만을 먹었기에 배가 너무 고파 근처 음식점을 검색했고, 구세주 성당 앞에 있고, 푸쉬킨 미술관이랑 맞닿아있는 “pinzeria bontempi”를 찾아 들어갔다.

이곳의 평가에 있는 모스크바에 와서 피자?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 피자는 하루 모스크바에 있으면서 두번인나 먹으러 왔다는 평에 궁금해져서 왔다.



그리고 나는 내 인생에서 먹어본 피자중에 제일 맛있는 피자를 만났다.

가격도 만족스러운데다가 피자와 맥주까지 마시니, 오늘 오전에 있던 인종차별이 다 꿈만 같고 예술 작품을 실컷 보고난 후 이런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자 더이상 부러울게 없었다.

이 집은 누가 모스크바를 간다 해도 추천할 모스크바 맛집이다.


좋은건 한번 더





구세주 성당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하기에 사진은 찍지 않았지만 그 높은 천장의 성당 안에 들어갔을때 느낀 홀리하다는 감성은 잊혀지지않았다. 오후 6시가 믿겨지지않을 정도로 따사로우면서 쨍한 햇살이 창문을 통해 고루 들어오는걸 보고있자니 뭔가 내 종교적신념이고 뭐고 일단 기도하고싶어졌다.

구세주 성당에서 나와 다시 다리를 건너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구름이 많더라니 해가 일찍 질 생각인지 노을이 천천히 지길래 그냥 다리위에 앉아 맥주로 달큰해진 얼굴을 식혔다.



해가 멀리서 지는걸 바라보는데 신기했다.

해가 이렇게 길 일인가. 게다가 이렇게 구름이랑 해가지는게 예쁠일이며 하늘에서 해가 비명을 지르듯 붉어지는 하늘을 넓고 넓은 푸른색이 그 비명을 막는것 같은 하늘의 색깔싸움을 보다 더 해가 지기 전에 지난번에 못가본 다리 건너편을 가 볼까 하고 걸음을 옮겼다.


해질 무렵 비명 지르는 해를 숨기는 구름들


다리 건너는 트레티야코프였다. 유명하다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을 지나가니 맥도날드와 버거킹 등 패스트푸드점이 모여있는 상점가들이 나오더라. 모스크바가 수도라 그런가 어딜가나 다 서울처럼 북적거릴것 같다는 내 예상과는 달리 곳곳에 여유가 넘치는 도로들, 사람들이 많았다. 이 트레티야코프 앞 상점가만 해도 분수가 있고, 러시아 정교회가 두어개 보이고 꽃집도 많이 보이는 상점가였다.


노을빛과 잘 어울리던 붉은색의 정교회 건물


이곳 저곳 구경하면서 해가 본격적으로 지길래 맥도날드 아이스크림을 물고 다시 강을 건너 돌아오니 바실리 성당이 눈 앞에 나타났다.


Tmi: 러시아 맥도날드 아이스크림은 한화로 380원!


딱히 어떤 방향으로 가야겠다 하고 마음 먹은것도 아닌데 자꾸 이렇게 예쁜 관광지들이 보이는걸 보면 모스크바가 나한테 본격적으로 구애를 하는거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밤에 보니 더 예쁜것을...!


바실리 성당 사진을 찍고 나니 기분이 너무 좋아졌다.

비록 아침에 일어나서 처음 간 가게에서는 인종차별을 당했지만 그 다음에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친절한 스타벅스 파트너도 만났고, 푸쉬킨 미술관에서는 봐야지 했던 작품들은 못봤지만 대신 어릴 적부터 내 눈에 익었던 러시아 예술품들을 많이 보았고, 그러고 나서 저녁을 먹기위해 들렀던 음식점은 내 인생 피잣집이 될 것만 같은 맛집인데다가 해가 지는건 시간에 쫓기지 않고 원없이 볼만큼 본데다가 천천히 걸어 걸어 모스크바의 여러 모습을 보고 마지막으론 바실리성당의 밤 모습까지 보다니.

나는 갈수록 모스크바가 마음에 든다.


노을과 함께 잘 어울리던 건물, 저녁 하늘에 대입해 보니 수군수군 하는것 같은 교회 건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