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6-19 모스크바 4일째, 노보데비치 수녀원 구경과 제모 받기
모스크바에 온 이후로 하루에 2만보이상, 3만보 가까이를 걷다보니 내가 드디어 지쳤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숙소에서 밍기적 거렸다. 이상하게 몸이 무거웠고, 일어나기가 싫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여행을 시작한지 어느새 3주인데, 횡단열차 탔던 일주일을 제외하더라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야근 많기로 유명한 업종에서 3년이나 일하면서 얼마나 운동을 했겠는가. 이렇게 비명을 질러대는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싶었다. 마사지를 받고싶지만 불곰국 사람들의 손길로 마사지를 받다간 내가 부서지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생각도 들고, 러시아가 마사지가 유명한 나라는 아니기에 패스하고 손으로만 연신 근육을 풀어주다가 포기했다.
누누이 말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아무것도 생각 안하고 내가 하고싶은 것만 하기로 다짐했으니 몸이 쉬고싶다고 말한다면 얼마든지 그럴 생각이었다.
누워서 밍기적 거리고 있자니 우리 방 룸메이트들은 전부 나갔고, 잠시 평화가 찾아와 자볼까…하는 순간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들어오셨다.
호스텔인걸 잠시 잊었다.
어차피 하루종일 집에만 있을 성격도 아니니, 이쯤 하고 일어날까 싶어 오늘은 뭘 할지 찾아보다 한 모스크바에서 유학했던 분이 받은 제모 후기를 발견했다.
https://blog.naver.com/doyeon1610/221538563713
러시아에 대한 한가지 Tmi라면 러시아는 꿀이 매우 좋은 나라이다. 불곰국이라는 별명 덕분인건지, 러시아에서 파는 꿀의 대부분은 찐 꿀이라고 한다 100% 꿀. 물론 꿀이 아니라 설탕이지만, 제모를 받아본 적 있는 친구들 말에 의하면 슈가로 왁싱하는게 더 몸에 부담 없다 그러길래 꿀이 유명한 나라니 설탕도 좋을것이다. 매우 친환경적일거다! 라는 뜬금없는 믿음이 생겼고, 인스타그램으로 DM을 보냈더니, 평일이라 그런가 당일임에도 불구하고 오후 6시에 가능하다기에 예약을 하고 길을 나섰다.
오늘은 여유를 부려볼까 하는 생각이기에 피크닉을 즐길 생각이었다.
오늘의 피크닉 장소로 선택된 곳은 노보데비치 수녀원.
말이 수녀원이지 사실은 왕실의 감옥으로도 쓰였다는 공간이고, 전쟁시에는 요새로도 쓰였으며 수녀원이 크렘린궁을 모티브로 했기에 작은 크렘린궁이라고도 불릴만큼 기가막히게 예쁘고 그 앞에 딸린 호수가 백조의 호수의 모티브라나 뭐라나 전천무후 온갖 공간으로 다 쓰이나보다.
내 숙소가 있는 곳에서는 정반대방향에 있어서, 마치 내 숙소가 동대문에 있다면 노보데비치 수녀원은 구로에 있는 정도의 거리? 천천히 지하철을 타고 타고 가기로 했다.
가는 길목에 형제 빵집 "Karavaevs Brothers"이라는 현지인과 관광객에게 유명한 레스토랑&베이커리 체인점도 있다고 하니 일석이조!
이 노보데비치가 있는 "Sportivnaya"역에 가려면 지하철을 몇번 갈아타야했는데, 서울처럼 지하철이 내려서 바로 환승통로가 있는게 아닌데다가 환승을 하면 역 이름이 바뀌기에 한번 길도 잃었다.
덕분에 남들은 돈내고 시간들여서 한다는 러시아 지하철 역 내부 구경은 실컷한 것 같다.
이게 어디야.
나는 살면서 이렇게 대중교통이, 지하철 역이 예쁜나라는 처음이었다. 예술로 유명하다는걸 온몸으로 알리고싶지만, 내심 자기가 먼저 나서서 말하기엔 민망하다는 듯이 여기저기 티나지 않는 구석구석마다가 예뻤다. 그건 확실히 러시아에서 즐긴 눈요깃감이 맞는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노보데비치 수녀원이 있는 지하철역 “Sportivnaya ”에 도착했다.
역 앞에 있던 슈퍼마켓에서 음료수를 사고, 조금 더 걸어가니 있는 베이커리에 들러서 음식까지 사고나니 아침에 몸이 무거웠던 나는 찾을 수 없게 갑자기 신이 났다.
이 레스토랑에서는 빵도 팔지만 음식이 유명하다고 한다. 내가 먹고싶은 음식을 말하면 1인분양으로 담아주는데, 전날 인종차별을 당했던지라 긴장 하며 제발 날 봐달라는 눈으로 직원들을 쳐다봤는데, 가게에 혼자 들어온 사람은 나 혼자 뿐인데다가 동양인은 더더욱 나 뿐이라 사람들이 다들 쳐다봤다. 덕분에 순조롭게 (?) 주문을 마친 후 음식을 흔들며 수녀원으로 향했다.
근데 수녀원에 왔더니 예상하지 못한게 있었다.
바로 입장시간….ㅎ…..
다섯시에 문을 닫는다고하는데, 내가 4시에 도착해서 그런지 입장 가능 시간이긴 하지만, 얼마 못볼꺼라더라. 그래서 티켓을 사겠냐고 묻는데 30분만에 호다닥 보고 나오고 싶진 않기에 바로 스루 하고 백조의 호수로 걸음을 옮겼다. 알아보지 않고 온 내 잘못이니까 어쩌겠는가.
차이코프스키가 이 호수에서 백조의 호수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느 부분에서 영감을 얻었을지가 눈에 보였다.
차이코프스키가 살았을 시대는 지금보다 몇백년은 전이었겠지만, 지금도 노보데비치 수녀원은 매우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과거에 귀족이나 왕족들의 감옥으로 쓰였다는걸 보면 번화가는 아니었을 것. 그런 만큼 지금과 다름 없이 고즈넉하고 조용했을 텐데, 이 호수를 가만 보고 있자니 행복은 멀리있지않고, 가까운 곳에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구나 싶었다.
피크닉 매트를 펼치고 가만 앉아서 호수를 멍때리고 바라보자니 바이칼 호수를 바라볼때랑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바이칼 호수가 너무 광활해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줄 것 같은 그런 고요함과 푸근함이었다면 이 백조의 호수는 고즈넉하지만 예쁘다. 고전 영화에서 아가씨가 우산을 쓰고 걸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의 공간. 백조는 없지만 대신 오리가 여기저기 꽉꽉 거리며 걸어다니고, 햇살은 적당하고.
이런 순간에 내가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그냥 어디 한적한 카페에 앉아 멍때리기보다는 지금이 더 황홀하달까.
장기 여행 가는 나를 위해 친구가 사준 피크닉 매트는 바이칼 호수에서부터 은근히 도움이 되었다. 내가 떠날 때 “나 가서 최소 3회 이상 피크닉 할꺼야!” 라고 해서 그런가. 센스있게 사준 선물은 필요할 때 조용히 존재감을 발휘했다.
사온 음식을 펼쳐놓고 먹고 있는데 저멀리서부터 오리들이 다가왔다.
왠지 오리가 많고, 사람들이 오리에게 음식을 주는걸 봤을 때부터 불안하다 싶긴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리들은 음식 냄새를 맡고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리를 옮겨야겠다.
한 세번쯤 자리를 옮겼을까, 처음과 달리 호숫가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폈다. 그러고 음식을 먹는데 세상에 하나같이 다 너무 맛있었다. 특히나 새우 샐러드가 너무 좋았는데, 칵테일 새우가 아닌 오동통한 새우가 아낌없이 들어가있어서 먹으며 너무 행복했다.
어느새 왁싱을 받으러 슬슬 움직여야 할 시간이 되었기에 걸음을 옮겼다. 노보데비치 수녀원은 역에서 약 20분 정도 떨어져 있기에 조금 걸어야했지만, 수녀원 인근이 모스크바의 주택가인지라 구경하는게 또 나름 재밌었다.
내가 지금 묵고있는 숙소 인근이 붉은광장과 크렘린 궁을 걸어갈 수 있는 위치라 그런지, 사람들이 늘 있었다. 하지만 이 수녀원 인근은 정말 주택가 그 자체였다. 공공기관으로 보이는 건물들과 아파트 상가로 보이는 것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관광을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모스크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볼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 큰 개를 산책시키는 노부부, 학교가 끝난건지 교복을 입고 떠드는 청소년들까지. 이들의 삶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에필선 매장은 지하철역 “Smolenskaya” 바로 코 앞에 있는 건물에 있어 어렵지 않게 찾았다.
내가 한국인일꺼라는건 생각을 못했는지 다소 당황하는게 느껴졌지만,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상냥한 사람들이었기에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내 인생 첫 제모 후기에 대해 얘기해보자면
일단 아프진 않았다. 처음에 움찔하긴 했지만, 곧 익숙해 질 정도의 아픔이었다.
게다가 매우 깔끔하게 제모가 되어 뿌듯할 정도.
그리고 가격도 저렴했다. 한국의 1/4 정도밖에 안되는 가격이랄까.
다음에 또 모스크바에 왔는데 제모가 필요하다면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단점이라면 건물을 올라오는 길이 조금 무섭다는 것?
처음 올때는 잘못 가는거 아닌가 싶었지만, 곧이어 나올 때 다시 보니 지하철 역 바로 코앞에 있고 그 코 앞에 있는 광장에서 공연도 하고 있었다. 다만 내가 갔던 광장 뒷편은 노숙자가 있어 조금 무서울 수 있으니 유의.
비포애프터 사진을 찍어놓질 않아 없는게 아쉽지만, 털이 확실히 모근까지 뽑혀서 그런지, 여행이끝날때까지 솜털같은애들만 올라왔다. 가격도 저렴한데다가 이렇게 효과가 좋다면, 모스크바에서 한번쯤 받아봐도 될 것 같다!
그렇게 제모까지 받고 기분이 좋아 여기저기 휘적거리다 보니 어느새 여덟시.
조만간 해가 질테니 오늘은 일찍 숙소에 들어가서 쉬어야지 하며 숙소 앞에서 내려 숙소 앞을 조금 걸어보았다.
숙소에 들어갈 때마다 젊은이들이많다고 생각 되길래 걸어본건데, 역시 예상대로 젊은이들이 좋아할법한 음식점, 가게들이 많았다. 골목골목 마다 분위기 있는 가게들이 많고 많은 러시아 젊은 청년들이 많아서인지, 숙소를 잘 잡았단 생각과 시간이 된다면 이 가게들을 한 개라도 가봐야지 싶었다.
그러다 며칠 전 찾은 슈퍼마켓에 들어가 오늘은 저녁거리를 장 봐 직접 요리를 해 먹어야지 하곤 요리를 시도하기로 했다.
저 소고기 두덩어리가 단돈 3천원이라는 사실에 감격하며 즐거운 저녁식사까지 즐기고 침대로 들어갔는데,
이상하다....
왜 오늘도 2만보를 걸었다는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