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방랑하는 풍류가와 여행객의 차이는 지붕

13-06-19 상트페테르부르크 6일차

by 역마살아임더


소울키친호스텔에서 체크아웃 하는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지 하고 생각은 했지만 전날 이상하게 피곤했어서 그런지 늦게 일어나서 내가 결국 먹은건 쇼핑하며 사온 키위


KakaoTalk_20200330_103709631.jpg 근데 너무 딱딱해서 몇개 못먹고 버렸다


체크아웃을 한 후 전날 미리 봐둔 에어비앤비 숙소 길을 따라 갔다. 어느새 여행의 절반을 넘어서 그런지 가방은 30kg을 넘었고, 그 와중에 옅은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자, 전날 내가 봐둔 곳까지 걸어서 10분거리였던게 어느새 30분이나 걸려버리고 말았다.

러시아를 한달동안 여행하며 내가 겪어본 지역 날씨 중 블라디보스톡의 날씨가 가장 변덕스러운 줄 알았는데 상트페테르부루크에게 1위를 주고싶다.

분명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는 날이 맑더니. 갑자기 흐리는 이 비는 뭐란 말인가.


30kg의 캐리어와 더플백, 백팩을 이고지고 끌고 끌리고 하며 도착했더니 가장 큰 문제는, 숙소가 6층이라는 것과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점 이었다.

유럽 숙소들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숙소가 많다더니. 여기도 그 중 하나였나보다.

30킬로그램짜리 캐리어와 더플백, 그리고 백팩을 매고 있던 나는 짐이 많아 한번에 옮기기엔 무리고, 두번에 나눠서 짐을 들고 올라갔는데 그 처참한(?) 현장을 공개합니다


5배속으로 돌렸음에도 한참을 내려가는 이 무시무시한 계단


한참 계단을 욕하며 올라가다 보니, 유럽은 복지가 좋다고 좋다고 다들 말하던데,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은 어떻게 이 계단을 오르내리는거지? 싶어지며, 광고천재 이제석 책에서 본 거동이 불편하여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에게 지하철 역 계단은 에베레스트로 느껴진다던 광고 시안도 생각나고. 갖가지 생각이 들었다.


온몸에 힘들 쭉쭉 빼며 도착했던 숙소가 내 예상과 다르다면 후기에 욕을 한바가지 쓸테다 하며 문을 열었다.

그렇지만 숙소는 내 예상대로 예뻤고, 꼭대기 층이라 그런지 천장을 열 수 있도록 되어있던 점은 매우 마음에 들었다.


KakaoTalk_20200330_103709631_01.jpg 휑한것 같은데 내가 호스텔에 있다 와서 그런지 널찍한게 마음에 들었다.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건 창문인데, 하늘에도 창문이 있고 내가 걸터앉을 수 있을 정도로 두꺼운 창턱을 가진 창문이 있는게 너무 좋았다.


이번에 여행을 하면서 내가 숙소에 대한 내린 기준은 이랬기 때문이다.

1. 러시아에서는 가급적 호스텔에 묵는다.

왜냐하면 러시아어를 1도 못하니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할 수있다면 하는게 좋을 것 같아서.

2. 북유럽에 가서는 전-부 에어비앤비에 묵는다

그리고 북유럽에 가면 큰 창문이 있고, 걸터 앉을 수 있는 그런 북유럽 감성이 물씬 나는 집에서 잔다.

3.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내리자마자는 무조건 개인 화장실이 딸린 방에서 잔다.

그런 내가 나름 까다롭게 골랐어서 그런지 보자마자 창문이 마음에 들어 당장에 창틀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고 나니 어느새 해가 뜨는게 보였다.



KakaoTalk_20200330_152134203.jpg 저는 이 사진을 찍기 위해 이 숙소를 고른 것 입니다



세상에. 블라디보스톡보다 더 예측하기 힘든 날씨라니.





한참 사진을 찍고 나니 어느새 오후가 되더라. 오늘이 나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하루를 오롯이 쓸 수 있는 마지막 날이기에 뭐라도 즐겨야지 하고 우산을 챙긴 후 숙소에서 나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마지막 관광지로 선택한 것은 바로 예르미타주 신관. 상트에 온 다음에 구관은 그래도 대~충 지나면서라도 한번 봤지만, 신관에 있는 작품은 하나도 못본것이. 신관에 피카소나 고흐, 마티스의 그림이 있다는데 전혀 못보고 갈 순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이 숙소의 좋은 점은 예르미타주가 바로 코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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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도 가볍게 숙소에서 우산을 챙겨들고 나간 예르미타주.

얼마전에 예카테리나 궁전에 갔다온 날 밤 자기 전에 아나스타샤 영화를 다시 보다 잠들었었는데, 아나스타샤에 나오던 궁전이랑 똑같이 생겨서 기분이 묘했다. 아나스타샤가 페테르고프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대사 보고 오오- 했었는데 이 궁전이 그 궁전인가보다. 내가 봤던 전시장이 그럼 그 영화에 나오던 연회장이었던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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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보고싶었던 건 다 본것 같아서 뿌듯했다.


KakaoTalk_20200330_103709631_05.jpg 사람도 없어 온실 분위기 물씬 나던 예르미타주 신관


예르미타주 신관에서는 구관 신관 통합 입장권 밖에 팔지 않는다 하여 (왜그런건지 이해 불가)

결국 예르미타주를 두번이나 전체 입장료를 지불하게 되었다. 국제 학생증이 있으면 무료라고 하던데, 생긴건 누가봐도 학생인데 학생이 아닌지라 어쩔 수 없이 바가지를 쓰게 된 기분이지만, 예술작품 보는데 돈을 쓰는것이 무에 아까우리.


마음을 비우고 꼭대기층부터 내려오면서 관람을 하는데 이제 하도 예술 전시를 봐서 그런지 조금씩 보이는게 생겼다. 남들이 유명 작품에 대해 일반적으로 평하는 것을 머리로만 아는것과는 또 다른 눈으로 가슴으로 보는 예술전시랄까.

예를들면, 드가는 여자의, 무용수의 활동이 눈에 보이는 작품을 그렸다. 상당히 따스한 눈으로. 왠지 오후 네시 무렵의 느긋함과 여자들이 춤을 추면서 느껴지는 긴장된 공기가 느껴지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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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하는 여자들의 공기가 느껴지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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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의 그림은 색채가 정말 부드럽고 먹먹하게 따뜻한 느낌이 든다는 것,

칸딘스키는 상트와 어울리는 화려한 색채를 과감하게, 하지만 모두의 화려함을 잘 쌀 수 있는 사람이구나.

피카소는 종이의 공간을, 질감을 확장 시키는 그림을 그렸구나,

반고흐는 유명하다는 그림들 외에는 잘 몰랐으나, 이번 기회로 먹먹하고 안경 안쓴 내가 보는 것 같은 뿌옇고 뭉개져 보이는 색감 외에도 다른 느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걸 알았다.


KakaoTalk_20200330_103709631_14.jpg 반 고흐에게 이런 그림도 있구나 싶었던 그림


그렇지만 그 외에도 유명하다는, 남들이 “봐야한다!”하는 그림 외에도 다른 그림들을 보며 강렬한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면 그걸로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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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금방이라도 말을 걸 것 같은, 상황이 그려지는 그림들


처음 예르미타주를 갔다온 후 전시관에 그림이 너무 많아 그림에 압도 당한다 그러자 예술전공인 친구가 꼭 남들이 봐야한다는 그림 외에 니가 한눈에 보기에도 너를 사로잡는 그림이 있었다면 그 전시에서 너는 얻는게 있는거라고 말을 해줬을때 남들이 봐야한다 하는 것에만 목매고 있던 내가 그 말에서 신선함을 받았어서 그런가. 이 관점에서 본다면 이번 관람은 매우 마음에 드는 전시 관람이었다.


KakaoTalk_20200330_103709631_23.jpg 내가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던 그 그림


누구의 그림인지도 잘 모르지만, 눈길을 끌어 한참을 쳐다봤고, 그리고 나가는 길에도 한번 더 보러 올라올 정도였던 그림. 이 그림 하나 덕분에 나는 예르미타주에서의 전시가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신관은 구관에 비해 사람이 없어서 전시 작품을 보기에도, 비가 와서 그런지 사람이 없는 이 전시관의 공기를 느끼기에도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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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통해 다른 공간 느낌이 나는것도 너무 좋았다.


구관과 신관을 다 돌아본 결과 느낀 점이라면 (전시 작 외)

구관은 궁전을 활용한 공간이라서 전시작보다는 공간에 더 눈길이 갔다. 유명한 작품들도 있었지만 그 작품들 외에는 시선이 전반적인 공간에 갔다면 신관에서 하는 전시는 공간과 어우러지는 그 전시품들에 눈길이 잘 갔다. 그래서 내 선택이라면 신관. 구관은 박물관, 궁전 관람의 느낌이 강했다.


KakaoTalk_20200330_103709631_19.jpg 아저씨, 색감이 너무 잘 어울리시는거 아닙니까?




이렇게 세계 3대 박물관이라는 예르미타주 관람 끝!






전시를 보고 나오니 다섯시였다. 러시아의 어마무시한 예술 작품 소장에 따라 또 시간을 뺏긴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밝은 길거리 풍경은 한달을 보고 있어도 신기했다. 이러다 나중에 한국 가면 해 지는게 어색해 보이지 않을까 걱정 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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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에서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마지막 저녁, 우연찮게 한달살이를 하였으니 이를 기념해야지 하며 근방에 있는 레스토랑을 찾아 들어갔다. 모스크바의 마지막 식사가 피자였던 만큼 이번에도 피자로 기념 하고 싶어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아 맛집을 찾아 헤매니 나온 “Goose Goose”




혼자왔냐는 말에 어느새 익숙하게 혼자라 답하고, 나는 아무자리나 줘도 상관 않을 생각이었는데 2층의 창가자리 까지 주니, 한달 기념으로 내가 나에게 잘 지냈다고 주는 포상으로는 더할나위 없는 식사였던것 같다.

혼자 밥 먹기를 무서워 하던, 혼자 쇼핑 못하던 나는 어느새 식당에서 혼자인데요 라고도 잘 하고, 쇼핑도 잘하고, 30일간 확실히 멘탈은 강해진 것 같다. 남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KakaoTalk_20200330_103709631_25.jpg TMI) 1층은 가볍게 밥먹고 갈 사람, 2층은 정식으로 즐길 사람들에게 내주는것 같다는 후기 봤는데 전 왜 2층 주셨을까요


그런 나를 발견하고 감탄 하고 있다가 오늘의 느낀점을 다이어리에 끄적이고 있자니 나온 피자는 모스크바보다는 못했지만 폭신하고 부드러운 도우에 아낌없이 뿌려진 피자와 소스가 훌륭하여 한달 기념 식사로는 매우 훌륭했다.

식사를 마친 후 계산하러 가니 나에게 베리 뷰티풀이라고 해서 이렇게 후한 점수 주는거 아닙니다.

정말로


KakaoTalk_20200330_103709631_26.jpg 한달동안 러시아 무사히 돌아다닌 나에게 치얼쓰!


피자를 먹으면서 어느새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곧 떠나야하니 또 내가 나에게 편지를 쓸 시간이군 싶어 한달살이를 한 소감을 간략히 적은 후 우체국을 찾아 떠났다. 이번에도 기상천외한 장소에 있는 우체국을 보고 감탄하며, (이번엔 철문을 열고 들어가 건물 세개가 맞닿은 골목 구석탱이에 있었다. 놀라운건 넵스키 대로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


또 내 맞은편에 앉은 아저씨가 러시아어로 주소를 쓰는데 정말 말그대로 휘갈겨서 아무 말이나 쓰는 것 같은 그네들의 필기체를 감상하고 편지를 보내고 나오니 시간은 여덟시지만 내가 익히 알고 있는 해가 질 무렵의 하늘로 변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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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 두 장소, 피의 구세주 성당과 페테르고프


넵스키 대로를 마지막으로 걸으며 한번 더 가게들을 꼼꼼하게 훑어보다 홀린듯 들어간 편집샵에서 기념으로 티셔츠도 하나사고, 전날 갔던 큰 쇼핑몰 건물이 보이기에 다시 들어가서 이 밤의 끝을 잡고 마실 마지막 맥주와 안주거리를 사고 나오니, 아까 비가와서인지 치즈쿠키 빛깔의 구름이 나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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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까지만 해도 왜이리 날이 변덕스럽냐 싶었지만, 이렇게 예쁜 저녁 노을을 보여줄꺼라면 얼마든지. 마음대로 라는 생각이 들만큼 예쁘고 황홀했다. 하늘을 힐끔 거리며 쳐다보며 걷다보니 러시아를 여행하면서는 야경을 구경한 적이 없단 생각이 들어서 왜지? 라고 생각하다 백야라는게 다시 생각났다.

해가 져야지 뭘 구경하던 말던 하지.

하도 해가 안져서 아침 느지막히 일어나 관광하는데도 무리가 없길래 백야라는걸 잠시 잊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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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돌아가 맥주를 마시며, 쇼핑한 것들을 가방에 쑤셔넣고 있는데 갑자기 천장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뭐지 싶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니, 천장에 난 창문에 빗방울이 맺히는게 보였다.


아침에도 비가 조금 오더니, 결국 비가 오는구나 싶어 한참 바라봤다. 평소에 로망이라면 로망으로 갖고있던, 하늘에도 창이 있어 누워서 비오는게 보이고, 해가 지는걸 구경할 수 있는 공간에서 한번쯤 살아보고싶다. 를 생각하고 이 숙소를 예약한건데. 이렇게 여행하면서 나도 모르는 새에 그 로망이 이뤄지다니. 게다가 이런 순간에 오롯이 나 홀로 이 감상을 맞이 할 수 있다니. 여행오길 참 잘했다. 싶었다.


불을 끄고 침대 옆에 있던 무드등만을 켠 채로 가만히 맥주를 마시다 괜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지막 밤을 걸어보고싶어 우산을 집어들고 나왔다.



날씨요정이라 그런지 기가막히게 비가 오지않을때에만 밖에 돌아다녔는데, 비 울 때 우산을 들고 한번 걸어나 보자 싶은 마음이었을까.

근데 의외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비내리는 밤은 반짝거려서 웃음이 났다. 너무 화려해서 질릴만큼이었는데, 심지어 비오는 밤도 이렇게 반짝거릴껀 또 뭐야.

너무 예뻐서 거부할 수 없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지막 밤이었다.



+)

그리고 잠결에 빗소리가 거세 일어났는데, 백야에는 두시에 해가 벌써 떠있더라.

해는 뜨고싶고 비구름은 해를 가리고 싶고. 지구촌에서 벌어지는 자연끼리의 싸움. 자연만의 작은 싸움인가 싶다가도,

천장을 두드리는 빗방울을 가만 보다 생각이 들었다.

하늘을 이불삼아, 땅을 요 삼아 잠들었다던 김삿갓씨. 당신의 말이 지금 너무 생각나네요.

거지, 아니 방랑하는 풍류가와 방랑하는 여행객의 차이는 지붕이 있냐 없냐의 차이인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