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러시아, 안녕!

14-06-19, 상트페테르부르크 8일차

by 역마살아임더



**오늘 여행기에는 그동안 못올린 러시아에 대한 필름사진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진 보기 좋은 편 입니다 :)


오늘 밤, 러시아를 떠나 핀란드로 가는데 날이 흐린건지, 내가 러시아와 헤어지는게 아쉬워서 새벽에 깬건지 알 수가 없었다.


KakaoTalk_20200331_175206257.jpg 이렇게 천장에 하나, 바깥을 향하여 하나 있던 에어비앤비


전날 새벽에 비가 마구 오더라니, 비는 어느새 그친것 같고, 아침이구나 싶어 일어나 즉석밥을 데웠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지막 날 아침인데 이렇게 흐리다니, 내가 가는걸 아쉬워 하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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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흐린 날이면 다 하기 싫고 늘어질까. 누군들 안그렇겠냐만은 나는 태양에게서 기운을 먹고 사는 사람마냥 해가 없는 날이면 유독 힘들어했다. 어디가 아픈건 아니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겁지 않은 곳이 없었다. 흐린 날씨가 마치 내 몸을 다 지배하듯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짐을 낑낑 거리며 들고 내려간 후 길을 나와 한참을 걸어가 버스터미널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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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로는 버스를 타고 넘어간다. 핀란드 헬싱키 까지는 버스 외에도 기차를 타고 넘어갈 수도 있고 (두시간 반 소요) 버스를 타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기차를 탈 수도 있었지만 러시아의 끝에서 끝까지 기차를 타고 왔으니, 이번엔 버스를 타보는게 어떨까 싶어 선택한 결과였다. 당연히 비용은 기차가 더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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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터미널에 짐을 맡긴 후 트램을 타고 다시 시내로 돌아왔다. 며칠 전 러시아의 날 처럼 몸이 무거운 탓에 마지막 날 뭘 할지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 하고 싶지않았다. 오늘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지막 날이자, 러시아의 마지막 날인 만큼 그냥 이 나라의 길거리를 즐겨야지 싶어 그냥 걸어다니기로 했다.

넵스키대로는 너무 많이 걸어다녔던 만큼 이번엔 골목골목을 그냥 걸어다니기로 했다. 그러다 마주친 친환경 제품을 파는 슈퍼에선 코코넛 워터를 싸게 얻기도 하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더 못걸어다니겠으면 들어가야지 하고 예쁜 카페도 만났다 (만은 다시 그 카페를 못찾았다고 한다.)



KakaoTalk_20200331_175206257_05.jpg 가게가 예뻤지만 호텔이란 말에 조금 부담스러웠다


걸어다니게 되면 얻는게 많다. 차를 타고 다닐때에는 도로가 어떤지, 날씨가 어떤지를 알 수 있지만 내가 직접 걸어다니면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그네들이 이 동네는 주로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지가 보인다. 그걸 보는게 나는 너무 좋았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으면 무작정 걸었고, 생각할 거리를 머릿속에 넣은채로 계속 되뇌이며 걸었다. 그러다보면 결과가 나오더라.



쌍트 (22).jpg 이곳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뒷골목에서 헤매다 발견한 길거리


걸어다니다 생각난 것이 있었다.

한국에서의 나는 무리에 섞여있을때에는 더없이 안정감을 느꼈지만, 1:1일 경우엔 겁냈다. 그래서 남들과 마찰을 겪을 일이 생기면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아무말도 못하고 나중에 속상해했다. 늘 아! 그때 그렇게 말할껄, 그때 그럴껄 해왔지만 한번도 행동 한 적이 없었었다.



쌍트 (21).jpg 이곳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그런 내가 소울호스텔에서 마지막날 밤,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일을 겪었었다. 자기 전에 먹어야하는 약을 까먹고 자리에 누웠다가 잠들기 바로 직전에 기억이 나 조심조심 약을 꺼내고있는데 누군가가 한국어로 나에게 뭐라고 하더라. 나만 움직이고 있는게 아닌데 굳이 한국어로 말하는게 어이없어서 뭐라구요? 라고 한마디라도 하고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다음날 부엌에서 마주쳤는데 굳이 내 앞에 앉아 친구와 전화하며 나를 욕하는 걸 듣자 화가 너무 나서 똑같이 행동해 주었다. 어차피 돈없어서 호스텔에서 자는거면서~ 훈장님이야 뭐야~ 그렇게 남 움직이는게 거슬리면 호텔을 가던가~ 나만 돌아다니냐 ㅎ 외국인들도 돌아다니는데~ 등등. 한국에서의 나라면 누군가와 마찰을 만드는 상황에선 정신없이 심장이 쿵쾅거렸을테다. 하지만 한번 용기내서 똑같이 행동하니, 그다지 걱정할 거리도 없었었다.



블라디 (18).jpg 이곳은 블라디보스톡입니다


이런 갈등을 만드는 상황을 일전엔 겁냈고, 갈등으로 인해 생기는 스트레스도 나를 망가뜨리는데 한 몫 했다고 본다. 하지만 이제는 스트레스가 되고 자존감을 깎아먹는 관계부터 쳐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나를 망가뜨릴 수 있고, 가장 나를 힘되게 하는 존재는 오직 나뿐이기 때문에.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내 깊은 감정, 깊은 대화는 내가 믿을만한, 얘기해도 좋을 만한 사람이라는 판단이 든 다음에 털어놓기. 매번 그 선이 어려워 나는 이런 말 하기엔 가깝지 않은 이에게도 나를 쏟아내고 후회했다.



KakaoTalk_20191120_092822073_05.jpg 사실 이곳은 이르쿠츠크의 강 입니다.


그런 고민을 머릿속에 담고 상트페테르부르크 뒷 골목길을 여기저기 걷다보니 그런 결론이 내려졌다.


- 인간관계에 있어 두려워 말고 자를 것은 자르기.

- 타인과 갈등을 일으키는게 두려워 내가 참지 않기

- 내 깊은 감정, 대화가 필요한 것들은 얘기해도 좋을 사람에게 털어놓기, 그런 사람이 없다면 나 자신과 많은 대화 하기

- 후회없는 관계들만 남기기


앞으로는, 더이상은 나 이외의 다른 타인에게 상처받는 일이 없기를



KakaoTalk_20200331_175206257_04.jpg 걷다가 뜬금없이 (?) 발견한 공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느새 내가 처음 보는 길에 들어서 있었었다.

내가 이제까지 걸어다녔던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길은 포장이 잘 되어 있는 길이었는데, 지금 내가 걷는 길은 흙밭이었다. 어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정말 진심으로. 갑자기 너무 내추럴한 길이 나타나서 당황스러울 지경. 사진을 찍어보고 싶었으나 내 옆에 다니는 사람들도 뭔가 심기를 거스르면 무서울 것 같은 사람들이 지나가서 앞만 보고 걸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대.



모스크바 (1).jpg 사실 이곳은 모스크바 : 구세주성당 앞 입니다


앞만 보고 걷다가 카페를 찾아 보니 근방에 카페도 한 1km는 가야 나온다고 하기에 후다닥 걸어서 도착하니, 부쉐가 있었다.

잊지말자 부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스벅급!

카페에 지친 몸으로 들어섰는데 자리가 없기에 날도 흐리고 너무 힘들었던 나는 평소라면 여행하며 절대 하지 않을 짓을 했다.


바로 빈 자리가 보이자 일단 가방을 던져놓고 카운터로 간 것.

사람들이 가방을 자리에 두고 카운터로 가는 나를 벙벙하게 쳐다봤다.

니네는 이렇게 두고 가면 물건 다 털어간다며?

마! 한국은 자전거 빼고 다 안훔쳐 간다!

이게 바로 한국식 양심이다!! K-양심이다 안하나!





부쉐에 앉아서 이 사람들의 카페 활용 행태와 한달동안 느낀 러시아의 느낀점을 적어보았다.


1. 편의점이 없고 다 슈퍼이다. 근데 또 슈퍼는 체인점화 되어있다. 대부분의 편의점이 해외 자본이라 그런가.

2. 맥도날드도 좌석표를 들고 가면 자리로 음식을 갖다준다.

3. 카페에서 음식을 시킬때 자리를 비우고 함께 가서 음식 고르기 없음. 무조건 교대로 가야함

4. 킥보드, 보드 엄청 타고 다님

5. 무인 계산대 심심찮게 보임

6. 모든 카페, 레스토랑에서 케이크도 팔고 다 파는 편

7. 꽃! 을 정말 많이 사고 선물하고 받는다.

8. 약국 진짜 많음

9. 핸드폰 케이스따위 관심 없이 산다.

10. 9와 연관 지어서, 핸드폰 최신기종에 대한 관심이 훨씬 덜하다.


이정도면 러시아 사람들 엄청 관심 갖고 본 정도 아닌가? 싶어지는걸?

나 조차도 여기가 어딘지 모를 곳에 앉아 이 공간에 가득한 외국인 구경하며 다이어리를 끄적거리고 있자니, 고3때 대학에 들어가면 할 일 리스트를 적었던 것 중에 “전국 단위로, 전 세계 단위로 주변 사람들이 어디있는거야ㅠㅠ 라고 물어보는 삶을 살고싶다.’ 라고 썼었는데, 적어도 이거 하나는 잘 이뤄냈구나 싶어갑자기 내가 대견해졌다.

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은 내가 지금 상트페테르부르크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를테니까.



KakaoTalk_20200331_175206257_07.jpg 이렇게 황량한 곳에 있던 버스터미널


어느새 시간이 여덟시가 되었길래 다시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 역 앞에 있는 쇼핑몰에 들러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바로 들어가기 싫어서 주변에 뭐가 없을까 하고 구글맵을 요리조리 돌려보고 있는데 근방에 아샨마트가 보이길래 마트에서 마지막으로 주변에 돌릴 당근 크림을 잔뜩 쇼핑을 한 후 터미널에 들어가 앉아있었다.



KakaoTalk_20200331_175206257_08.jpg 생리대 앞에서 세상 진지하던 아저씨


열한시가 되자 나처럼 핀란드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버스에 올라탔고, 버스가 출발했다.

약 여덟시간 정도를 달리면, 핀란드에 도착 한다.

버스는 출발 하자마자 불을 껐고,버스 안은 암전이었다.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러시아에게 혼자 인사를 건넸다. 네바강이 지나갔고, 예르미타주 박물관이, 겨울 궁전이 지나갔다.




이상하게 예르미타주가 멀어지자 눈물이 나더라. 왜였을까. 한달간 있었다고 정이 많이 들었나보다.

멀어지는 예르미타주를 보며, 이 밤이 지나면 핀란드에 도착하게 되는게 얼마나 신기한지 곰곰이 생각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땅바닥엔 어떤 금도 안 그어져 있는데 “땅”은 물리적이고 구체적이지만 “국경”은 눈에 보이지않으나 물리적이구나 싶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한걸음 차이로 국경이 바뀌고 나라가 바뀌는데. 국경이라는 것은, 땅이라는 것은 얼마나 추상적이면서 상세한 것일까.

그렇게 러시아와 작별을 고했다.

안녕, 안녕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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