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비빔밥 먹고 알라스 씨-풀에서 씨-스윔하기

17-06-19 헬싱키 3일차

by 역마살아임더

드디어 월요일이 되자, 토미는 아침 일찍 출근한다며 나갔다. 오늘은 뭐할꺼냐는 질문에 음...Allas Sea pool 에 가볼 생각이라고 하자 오-! 그거 좋지. 라고 답해준 그는 출근했다. 그는 디자이너로, 이 근방에 있는 사무실에 동료들과 함께 일한다고 했다. 집에 있는 책들을 보니 그래픽 디자이너 인것 같았다. 핀란드에서 만난 디자이너라. 뭔가 잘 어울리기도 하고, 조용한 그의 성격을 보면 왠지 차분하게 일도 잘 할것 같았다.


그러고 좀 더 뒹굴 거리다 느지막히 일어나 키위를 까먹고 숙소에서 나오니 열한시 반이었다. 아무래도 백야속에 살다보면 행동이 느려지는 것 같다. 물론 한국이었다고 해서 딱히 일찍 일어나서 활동하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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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제 갔던 길 말고 다른 길로 내려와 봤다. 좀만 가면 도시가 펼쳐지면서, 당장 이렇게 1990년대 해외 시골 풍경같은 길이 나타나는 헬싱키라니. 그래도 핀란드의 수도인데 이렇게 자연과 가깝다니. 그게 신기했다.

이런 자연을 보고 자라다 보니, 사람들이 여유로워지는걸까. 스트레스 받아도 조금만 눈을 돌리면 자연이 보이니까.


내가 여유 없이 살아온 이유는 이런 부분에서 시작한거 아닐까. 초록을, 푸름을 보고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없는 삶의 연속에서 시작된 여유의 고갈.


여유가 없다는 관점에서, 나는 자라면서 TV를 보는게 몰래 보는 것만 허용 되었기에, 책을 읽는데 걸리는 시간은 ‘시간이 든다’고 인식하지 않았지만, 콘텐츠, 특히나 영상 콘텐츠를 보는 것은 시간이 들고, 소비라고 인식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콘텐츠 즐긴는 시간이 아까웠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시야에서 영상 말고 모든걸 차단하는 영화관에서는 콘텐츠를 잘 감상하지만 집에서 즐기는 드라마는 빨리빨리 앞으로 땡겨보는, 그런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마음의 여유를 억지로라도 만들었으니, 이젠 그 시간이 소비는 맞지만, 나를 위해 채우는 시간이라고 인식할 수 있게 해 봐야겠다.



이런 내 맘을 어떻게 알았는지 깜피에 도착하자 길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상당히 듣기 좋았던지라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은행으로 걸음을 옮겨 가지고 있던 달러를 유로로 바꿨다. 좀 바보같았다. 내가 유럽 여행을 하면서 왜 달러로 바꿔왔을까. 심지어 러시아를 가는데 달러로 바꿔서 여행을 했다. 다음에 장기로 여행하게 된다면, 가는 행선지를 잘 보고 환전해야지. 환차익으로 얼마를 잃은건지 감이 잡히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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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큰 환차익을 보고 유로를 바꾼 후 눈물을 머금고 어제 본 문 닫았던 빈티지 샵들을 가보려고 디자인 지구쪽으로 걸어가는데 배가 너무 고프더라. 은행에서 예상치 못하게 꽤 오래 기다린 탓인가 싶어 근방에 있는 음식점을 검색하니 비빔밥을 파는 한식집이 검색됐다.



평소의 나는 조금 건방지지만, 해외에 나와서는 한식을 조금도 그리워하지 않았다. 평생 먹어온건데 뭐 까짓거 며칠을 안 먹는다고 그리워할 이유는 없는것 아닌가. 게다가 여행 와서는 여기서만 먹을 수 있는 것도 있는 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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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한달 넘게 라면을 제외한 한식을 못먹자 너무나도 한식이 먹고싶었다. 그래서 한식집이 있고, 평이 나쁘지않다는 것을 확인 하고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한식집, “기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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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와에서는 오이지도 무료로 가져다 먹을 수 있게 해주어, 비빔밥이 나오기 전까지 오이지를 한 접시 가득 먹고는 또 한접시를 갖다 퍼먹었다. 음식을 퍼담다 보니 오이지가 나름 샐러드 같아 보이기도 하더라. 처음엔 왜 오이지를 이렇게..? 라고 생각 했지만. 그리고 헬싱키 사람들은 상당히 젤리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음식점에서 입가심용으로 두는 간식이 젤리들이었고, 슈퍼에 가도 젤리가 종류별로 걸려있었다. 딱딱한 젤리 말랑한 젤리 큰 젤리 작은젤리 등등.


러시아가 무뚝뚝한 얼굴을 위해 단걸 먹었듯, 여기도 안그래보이지만 은근 말랑 거리는 사람들의 나라인가

집주인 토미의 얼굴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오이지를 퍼먹다 보니 비빔밥이 나왔고, 오랜만에 먹는 한식이 너무 맛있어서 평소 놀러와서 한식 찾는 사람들에게 왜? 라고 생각했던것을 무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제가 진짜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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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곳의 평을 보고 끌리게 된 이유가 구글맵 후기에 “한국에 있어도 이정도 맛의 비빔밥집이면 유명해질 수 있다”는 말 때문이었는데, 한식이 그리워서 한국의 쌀로 만들어 찰기가 있는 밥이라면 뭘 먹어도 맛있게 먹었을테지만, 진짜 그 평이 딱 맞다 싶을 만큼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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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호로록이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비빔밥을 먹고 든든하게 쇼핑을 하러 길을 나섰다. 호스트 토미의 말이 맞다고 증명이라도 하듯, 전날 다 문닫았던 가게들이 문을 활짝 열고 사람들을 맞이 하고 있었다. 전날 아무것도 없는 디자인지구를 돌아보며 당황했던 나로써는 이렇게 가게들이 문을 열어놓고 있자 이게 바로 북유럽의 짬바구나 싶었다.




디자인 지구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디자인 지구의 특색있는 가게들을 많이 구경한 것 같다.

다양한 톤의 검은 색 유니섹스 옷을 파는 가게, 자기만의 색감있는 소품으로 가게를 가득 채운 카페, 레코드샵, 전자제품 가게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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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넘치는 헬싱키 가게들


그리고 보이는 빈티지샵마다 전부 들어가서 구경하다가 드디어 하나 건졌다.

내가 개인적으로 스톡홀름에 가면 꼭 하나쯤 사와야지 하고 다짐했던 브랜드의 바지를, 그것도 내가 평소 사고싶다 생각했던 연하늘색 바지로. 비록 사이즈는 다소 큰 것 같지만, 매장에서 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가격에 구했다는 점에서 매우 만족했다.


이래서였을까, 미드에서,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와일드 차일드에서 보면 아이들이 무도회에 가기 위해 옷을 사러 빈티지샵에 들어가서 옷을 고른다. 이런데서 사는 옷은 유방암 위원회로나 가는거거든? 이라던 파피무어가 신나게 옷을 집어들었듯, 건지면 좋은게 나타나는 곳이 빈티지샵인것 같다. 매력이 줄줄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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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시간이 세시쯤 되고, 내가 뭔가를 건졌다는 확신이 생기자 오늘의 쇼핑은 여기서 그만 해야지 하고는 카페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카페에서 차를 한잔 마시고 Allas Sea pool 로 가야지 하고는 내 눈에 꽂히는 카페를 찾아 다시 길을 걸었다.


그러다 괜히 문구 소품샵에서 엽서도 사고, 독립출판으로 보이는 서점에도 기웃거리다 보니 시간은 훌쩍 흘렀다. 이젠 정말 아무 카페나 들어갈꺼야! 라고 다짐하고는 골목을 꺾었는데 거기서 바로 보인 카페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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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뭔가 하나씩의 메시지를 던지는 입간판들


역시나 커피를 못마시는 나는 오늘도 코코아를 시키고, 오늘 산 것에 대한 소득을 만족해 하며 글을 쓰고 있는데 내 옆에 꼬맹이가 와서 알짱 거렸다. 내가 신기해보였나. 그럴만도 한게 아까 산 옷을 꺼내보며 뿌듯해하고, 엽서를 꺼내며 디자인에 감탄하는 사람을 언제 어디서 볼꺼야.



애기랑 잠시 앉아서 몸짓으로 놀아주다 보니 어느새 여섯시가 되었다. 수영장엔 일곱시에 들어갈 생각이었으니 슬슬 가야했다. 이 수영장의 이용 가능한 시간은 오후 여덟시까지이고, 하루 종일 들어갈 수 있는게 아니었기에 마지막 타임을 노려서 들어가기위해 열심히 걸어가서 센트럴 마켓에 도착하여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KakaoTalk_20200413_095507290_22.jpg 이 팔찌를 센서기에 대면 사물함 이용 가능!


수영장은 바로 앞에있는 바닷물을 끌어서 쓴다고 하고, 겨울에도 김이 펄펄 나는 물에서 수영 할 수 있다더니, 내가 갔을때는 왜 안그런건지 너무 추워서 입술이 덜덜 떨렸다. 너무 추워서 뭘 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고, 튜브에 가만 누워있어야지 하고 갔는데 튜브가 뭐야,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그 순간의 추위가 생각나니 몸이 서늘해질 정도로 추웠다.

물 온도는 살짝 미지근 하였으나, 바람이 거세게 불어 물에 젖은 피부온도가 사정없이 내려가는 탓에 춥다고 느낀 것이다.


KakaoTalk_20200413_095507290_24.jpg 푸릇푸릇 allas sea pool


그래서 그냥 저냥 누워있는둥 마는 둥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너무 추워서 여기서 죽을것 같았다. 바이칼 호수에 알몸으로 들어간 기분이었다. 결국 포기!포기!를 외치며 부대 시설 중 하나인 사우나로 들어가서 가만히 몸을 녹이며 이런 부대시설이 없었으면 난 죽었을꺼다. 동사. 정말로.


몸이 서서히 녹기 시작하자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겨 가만 보니, 핀란드식 사우나라더니 러시아에서 했던 반야와 매우 흡사해보였다. 뜨겁게 달군 돌이 달그락 달그락 거리고, 거기에 찬물을 부어 습기를 만드는 방식으로 하는 사우나. 어제는 순록의 원조는 스웨덴이다, 핀란드다라고 싸웠었다면 오늘은 이 사우나가 러시아껀지 핀란드껀지로싸우겠다 싶어지더라.


몸이 좀 녹은 것 같아 인증샷만 찍자 하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는데 너무 추워 어금니를 악 물고 딱 한장만 건진 채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숙소로 향했다. 신기한게 보통 워터파크 같은 공간을 갔다 샤워하러 가면 소독약이 몸에 붙은 느낌이 들던데, 여기는 바닷물을 써서 그런가 산뜻함만이 있었다. 숙소에 가서 본격적으로 샤워하겠다 생각 하고 비누만으로 몸을 씻고 나왔는데 어스름한 햇빛에 몸이 따스해졌다.


KakaoTalk_20200413_095507290_21.jpg 나오는 길에 발견한 배. 센트럴마켓에서 배를 타면 헬싱키 근처 수오멘린나 섬에도 갈 수 있다


어느새 아홉시가 된 시간인지라 Voi를 타고 숙소로 향하는데, 어느새 아홉시 반인데도 이렇게 해가 안진게 신기했다. 어제도 생각했듯 상트에선 아홉시쯤 되면 그래도 해가 지는 척이라도 하던데.

해가 지지 않는 헬싱키의 도로를 전동 퀵보드를 타고 지나가는데 오후 아홉시라 그런지 가게들은 문을 닫고, 길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는 텅 빈 거리가 너무 신기했다.

마치, 버려진 도시에 나 홀로 전동 퀵보드를 타고 돌아다니는 기분이랄까. 나같은 관광객이 한명쯤은 있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아 텅 빈 도시에 있는 기분을 만끽하며 전동 퀵보드를 타니 이마에 부딪히는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니 어느새 숙소 근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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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없는 텅 빈 헬싱키 길거리


숙소에 들어가기 전, 슈퍼마켓에 들러 다음날 아침으로 먹을 과일과 요구르트를 사려 했는데 신라면이 보이더라.

기왕 오늘 점심에 비빔밥을 먹었으니 오늘 야식으로는 라면을 먹을까 싶었다. 아 왜 수영 하고 나와서 먹는 신라면이 존맛이니까.


KakaoTalk_20200413_105111161.jpg 그리고 수출용 신라면이 이렇게 실합니다


컵라면 먹을 생각에 설레 하며 숙소로 들어오니 티모가 오늘 하루는 어땠냐며 한국 여자 국가대표 축구 경기를 보는 중이었다며 쇼파를 내어주었다. 신라면에 물을 붓고는 그와 같은 소파에 앉아 축구를 보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시간이라고 느꼈다. 뚜렷히 기억나는 대화는 없지만, 그가 내 이야기를 사려깊게 들어준다는 생각은 들더라.


에어비앤비 호스트들은 이런 맛에 하는걸까, 이방인의 다른 삶 얘기를 들으며 상상하고, 견문을 넓히는 맛.

그렇게 한참 떠들다 다음날 출근해야하는 그를 위해 먼저 방으로 가겠다고 하고 방으로 들어와 누웠다.

밖이 너무 밝았다. 자도 되나 싶을 정도로.


KakaoTalk_20200413_095534271_01.jpg 이게 밤 11시의 햇빛입니다. 믿기지않죠?


전에 그린란드에 대해 본 글이 생각났다. 위도가 높아 백야현상이 길게 가는 편이고, 백야 기간엔 해가 안진다 생각하면 된다는데 그때가 자살율이 가장 높다고 하더라. 나는 28년동안 매일매일, 일년동안 해 지는 시간에 차이는 있더라도 매일매일 해가 지는 삶을 살아왔기에 백야가 그저 신기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해가 지지않는게 너무 지겨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한달 조금 넘게 백야를 경험한 나지만 가끔 새벽에 자다 햇빛에 눈을 뜨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

그들의 삶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