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19 스톡홀름 3일차
느리게 일어났다. 몸이 안좋은것도 있지만 전날 밤이 너무 무서웠다.
내가 이 숙소에 처음 들어와서 말했듯 이 숙소의 주인은 미대생으로 생각 되었다. 그래서 곳곳에 본인이 그린 그림이 있었고, 침실에서 바로 나가면 아그리파 석상이 있었고.
별로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으나, 지난 밤에는 갑자기 그 모든 것이 무서웠다.
당장 내 침대와 마주보는 벽에 실제 사람 길이 만한 긴 액자가 그림 없이 덜렁 걸려있었다.
아마 그 액자의 주인으로 생각되는 그림은 거실 한켠에 걸려있었는데,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전날 밤 잠들 무렵이 되어 자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누군가의 인기척으로 생각되는게 느껴졌다. 그래서 일어나서 문을 열었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으나 문을 닫다 그 그림의 뒷모습을 생각없이 바라봤는데 이상하게 눈을 뗄 수 없었다. 낮엔 괜찮았으나, 그 뒷모습이 왠지 돌아볼 것 같다는 망상이 들었기에. 잠시 바라보다 방문을 닫고 누웠는데도 잠이 오질 않았다. 한번 찾아온 공포심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한국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전화해 한시간 반동안 무섭다고 엉엉 거리다 잠이 들었다. 이제까지 이틀동안 잘 자다가 왜 갑자기 지난 밤에는 그렇게 무서웠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전날 야근하다 세시에 잠들었으나, 한국 시간으로 다섯시 반에 내가 공포에 질려 거는 전화를 한시간 반이나 받아준 남자친구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인사를 다시 전한다.
전날 있던 일에 대한 공포심을 떨칠 생각으로 일어나자마자 방문을 다 열고 다니며 확인했다. 하지만 지난 밤 나를 겁에 질리게 만든 존재는 그 어느곳에도 없었다.
혼자 잘 자고 혼자 여기까지 와 놓고 결국 내 상상력 때문에 나는 힘들어한건가. 역시 상상력이가장 무섭구나.
지난 헬싱키에서의 경험대로라면 일요일엔 왠만한 가게도 문을 닫았을 것이라 생각 했기에 쥬니바켄에서 피크닉이나 즐길까 하는 생각이었다. 쥬니바켄에는 삐삐 박물관 외에도 바사 박물관 등 부지가 넓은 테마파크였으니까.
하지만, 쥬니바켄에 가기 위해 길을 나왔는데 가게들이 문을 열었더라.
어라?
그래서 바로 방향을 바꿔 쇼핑하러 가기로 했다.
핀란드에서는 일요일이라고 가게도 다 닫고, 음식점도 닫았길래 이번엔 휴일도 끼어있어 당연히 일요일까지 쉴 줄 알았는데. 방향을 바꿔서 트램을 타고 아크네스튜디오로 향했다.
트램을 타고 스쳐지나가는 경치를 보는데 자꾸만 용과 사자가 생각났다. 러시아에서는 독수리가 자꾸 생각났고, 헬싱키는 갈매기가 생각났다. 하지만 스웨덴에서는 저 특유의 뾰족한 지붕을 용이 발톱으로 쥐고 올라앉아 있을 것 같았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작가의 책에 자주 나오던 악역이 용이라 그런건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용이 지붕을 발톱으로 움켜쥐고 있으면서 사자를 노려보며 으르렁 하는 이미지가 생각난다는건 상당히 구체적인거 아닌가.
아크네 스튜디오에 가니 정말 눈이 돌아갔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고 관심 있지만 가격 때문에 선뜻 사 입기는 어려웠던 브랜드인데, 여기에 오니 가격이 선뜻은 아니지만, 이정도는! 하고 살 수 있을 가격이었다. 스웨덴, 본토까지 왔고 처음 내돈 주고 사니 아크네 스튜디오의 메인 컬러인 분홍색의 뭔가를 사야겠다 하는 마음으로 둘러봐도 마음에 드는게 너무 많았다. 마음에 드는게 많은데다가 아카이브라 그런지 가격이 훨씬 더 내려가있었다.
오늘 급하게 사지말고 정 생각 나면 내일 사야지 하는 마음으로 아카이브가 아닌 정규 매장에 들어가 구경 하다 한국에 있는 엄마 생일 선물을 샀다. 막상 내 것을 산 것은 아니지만, 아크네스튜디오 특유의 분홍색 쇼핑백을 들고 가게를 나오니 기분이 좋았다. 이걸 위해 돈을 벌은거지! 하는 마음.
다른곳으로 더 이동해보고 싶었으나, 내가 오늘은 일요일이라 가게들이 안열꺼야, 라고 생각해 늦게 나왔던 것과, 문을 열긴 했지만 일요일이라 일찍 닫는 것이 맞물려 다섯시에 문을 닫는다고 하더라. 그래도 스웨덴에 와서 행복하게 쇼핑을 했으니 만족스럽게 쇼핑백을 흔들며 저녁을 먹으러 향했다. 내일이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하니까.
나는 그러고 보면 색깔을 활용한 마케팅, 스토리 마케팅에 더럽게 약했다. 악세사리를 잘 하지 않는 내가 꾸준히 데일리 템으로 어딜가나 끼고다니는 티파니 반지만 해도 그랬다.
해당 반지는 은과 루베이도라는 재질이 함께 꼬인 반지로 루베이도는 여러 성분을 섞은 합금이지만 그에 티파니에선 스토리를 녹였다. 연금술사가 연구하던 재질이다, 그래서 뜻은 성취, 열망 등을 가지고 있다 등. 그 스토리에 넘어간 나는 무려 5년이나 그 반지를 갖고 싶어 애썼었고, 결국 내가 어딜가나 끼고 다니는 소중한 물건이 되었다.
유사하게, 아크네스튜디오의 색깔은 그저 나에게 이 브랜드를 꼭 사고싶단 생각을 했는데 뭐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에서 시작했다, 룩북이 멋있다 하는 얘기보다는 이 페일핑크가 사람을 홀렸다. 티파니랑 다른 이유인가. 원래 중이 제머리 못깎는다 하는데, 마케팅이나 광고를 하다보니 유독 이런 상술 (?)에 엄청 약했다. 좋은게 좋은거지, 그만큼 내가 이 업에 애정을 가진거란 반증이니까. 뭐가 됐든 나는 내 일이 좋았다.
45일간 돌아다니고, 여행 하면서 나는 과연 이 일을 하고 싶은건가에 대해 고민 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Yes였다. 애초에 힘든 직업이라는걸 알면서도 내가 뛰어들었던 이유는 사람들의 마음을 홀리게 하는게 재밌었다. 사람들을 움직이고 어떤 생각을 갖게 하는게 재밌었다. 그리고 실제로 광고를 집행하면서 내가 일한 부분이 사람들에게 보여지는게 기뻤다.
결론은 내려진 것 같았다.
일요일 저녁이라 그런가, 또 길거리가 조용했다. 문 연 가게들 없나 기웃기웃 거리다 보니 한 피잣집이 눈에 띄였다. 비건이라는 말도 흥미로웠고, 뭔가 분위기 있어보이는것도 마음에 들었다.
왠지 내 여행의 마지막, 마지막 저녁이라 생각하니 기분도 싱숭생숭해지는데,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바람이 살랑 거리고 들어오던 피자집.
그러나 음식은 그저 그랬다.
비트가 들어간 피자라길래 새콤하려나? 하고 시켰는데 새콤한 것은 둘째 치고, 너무 무가 씹혔다. 하지만 도우가 쫄깃한 것도 좋았고, 창문으로 바람이 살랑살랑 들어오는게 시원하면서도 여행의 아쉬움과 열망을 식혀주었다.
와인한잔에 살짝 알딸딸해져 숙소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괜히 마지막 밤이라 생각하니 설레고 싱숭생숭한 마음. 연신 창밖을 쳐다보았더니 창밖에 지나가는 건물이 갑자기 생경했다. 왜 생경할까 골똘히 고민하다 떠올랐다. 나는 평생을 서울에서만 살아왔지만 내 인생에 짧다면 짧은 40일 남짓하는 기간동안 해외에서 이제까지와 다른 시야를 보고 살다보니 어느새 이 풍경이 나한테 익숙해졌나보다.
이런걸 보면, 사람이 왜 적응의 동물이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거의 30년을 서울에서 살았으면서도 40일 다른 경치 봤다고 그 경치가 익숙해져버린 것을 보면. 이제까지는 길게 여행 해 봤자 일주일 정도라 그런가,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 자체도 생경했다.
재밌었다, 그동안.
숙소에 도착하여 다이어리를 정리하고 끄적거리고 있자니 평소엔 열시, 열한시면 잠이 오더니 이날따라 잠이 유독 안왔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괜시리 섭섭하고 여러 생각이 드는 밤, 앞으로 내가 이렇게 긴 여행을 할 일이 또 있을까. 돈은 얼마든지 벌면 되지만, 이렇게 긴 시간을 선뜻 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살면서 처음으로 내 자의로 길게 쉬어본 여행, 여행은 아무리 즐거워도 어느새 끝이 다가오기 마련이다.
해외취업을 해볼까, 많은 생각이 드는 싱숭생숭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