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일어나니 아바나 한복판이었다

21-10-18 아바나운나나

by 역마살아임더


대학교 시절, 과제 때문에 봤었으나 볼 때 마다 다른 감상으로 보게 되어 가끔 보는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영화 “연인”에서 주인공이 남자주인공과 첫 관계를 한 후 시장안에 있는 그의 독신남의 방에서 눈을 뜨며


“눈을 떴을 때, 나는 시장 한복판이었다.”라는 방백을 한다.


쿠바에서의 첫 아침, 내 감상은 그것이었다.


전날 같이 간 일행들과 신나게 술을 퍼마시고 네발로 기는 기행까지 펼친 아이들을 각 방에 밀어넣고 마지막으로 시계를 본 건 새벽 여섯시. 그런데 시끄러운 소리에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오후 열두시가 막 된 상황.

평소 조금의 소리에도 잠을 못자는 나는 당연히 낯선 소리가 나자 호기심이 피곤함을 이긴 탓이었다.

깨질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어디서 나타난 사람들이죠



전날 아무것도 없어 신기해 했던 그 곳에 정오의 햇살이 비추며 주변을 살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두번째로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한국에서만 나고 자란 나에게는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산다고? 싶은 곳이 눈앞에 보였기 때문.


공사장아냐? 싶은 곳에서 연신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고, 아래쪽을 살펴보니 (건너편 건물로 미루어 보아 우리 숙소는 약 2~3층 정도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니 여기는 공사장 한복판이 아닌 아바나의 한 거리였다.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는 풍경


어이가 없어 눈을 깜빡이며 여기가 뭐지 라는 생각을 한참 하자 내가 움직이는 소리에 같은 방에서 잤던 일행이 일어났다. 방이 더워서 그런지 에어컨을 켜고 다른 방 아이들을 깨우고 얼른 급하게 씻었다.

물이 상당히 안나오는 편이었음에도 어찌어찌 샤워를 할 수 있을 정도여서 다행히 긴머리의 둘은 모두 샤워를 마칠 수 있었다.

씻고 나온 후 바깥이 더우니 대충만 말려도 되겠지 하면서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다른 방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이 아직 술에 취해 있어서인지 몸도 가누지 못했고 그나마 일어난 사람은 쿠바의 변기와 찐한 대화를 나누었고, 그걸 보고 물이라도 사와야겠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와이파이 카드도 살 겸


저 노란 건물에서 사람들이 뭔갈 샀는데 낮엔 이렇게 다르다


우리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와이파이 카드 판매처는 플라자 호텔 내부였는데, 숙소에서 나가 큰 길이 나올 때 까지 걷고, 그 큰 블록에서 아바나 대극장 옆에 있는 플라자 호텔을 찾아갔다.

와이파이카드는 1쿡, 다섯명이니 다섯증


와이파이 카드를 산 후 다시 돌아가는 길에는 물 파는 곳을 찾아 물을 사는데, 그러다 이곳이 진짜 공산주의 국가긴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물이 딱 한종류 밖에 팔지 않았기 때문. 공영 물 브랜드 한가지였다. 전날 밤 맥주를 마실때도 맥주는 한가지 종류 뿐이었는데, 물까지 한 종류라니. 마침 지나오는 길에 마주친 슈퍼에도 공산품이 정말 말 그대로 공산품이구나 싶은 정도의 종류 밖에 없었다.

자본주의 나라에서 태어나 스스로를 자본주의의 노예라고 부르는 나에게는 적잖이 신기한 관찰이었다.


같이 갔던 친구와 바라본 쿠바


그리고 숙소 창문에서 멀리서 바라보지 않고 내가 직접 내려와 사람들 사이에 섞여 바라본 쿠바, 아바나는 누구나 반박할 수 없게 예뻤다.

사람들은 언제 어떤 광경을 보고 예쁘다고 생각할까.
내가 평소 보고 겪고 서있던 그 경치와는 사뭇 다른 풍경일 때, 그 안에서 낯섦과 조화를 함께 발견할 때 예쁘다고 생각 하고 탄성이 나올 것이다.

그 광경은 아마 대부분 정갈하고, 깔끔하고, 색이 잘 어우러질 때 그러지 않을까, 라는 가정을 한다면
쿠바는 그 정반대임에도 탄성이 나올 만큼 예뻤다.



깔끔한 길거리와는 거리가 멀고, 이런데서 사람이 산다고? 싶은 곳에서 사람들은 연신 드나들고 있지만 그 무너져 가는 것 같은 건물 속에, 도로에, 지나가는 그네들의 모습에 삶이 담뿍 담겨 있었다.

가끔 여행 하면서 어떤 순간들이 너무 강렬해서 기억에 남겠다 싶은 순간이 있다.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언제가 되더라도 다시 기억에 남겠구나 싶은데 이제까지 나한테 그런 강렬한 기억인건 13살 때 경유지로 들른 모스크바에서 기내에서 내리니까 눈이 진짜 허벅지까지 쌓여서 그 차가운 눈의 감촉에 깜짝놀랐던 순간, 15살때 인도에 갔을 때 폭우가 쏟아져서 차안에 갇혀있었을 때, 18살 때 프라하에서 프라하성 야경을 보고 넋이 나갔던 순간, 뮌헨에서 한눈에 안담길 만큼 엄청 큰 신시청사를 봤을 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었다.


나에게 놀라움을 줬던 바로 그 순간


18살 때 부터 이 쿠바를 겪기까지가 꽤 갭이 큰데 그 이유는 아마 핸드폰 인 것 같다. 15살 이후에 여행 갈 때마다 어딜가나 핸드폰이 터지니까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 연락을 계속 할 수 있어서 무슨일이 생겨도 괜찮다는 근자감이 있었는데 쿠바에서는 핸드폰도 안터지고, 핸드폰이 안터지는 곳에 과연 삶이 있을까 하는 이상한 핸드폰 의존증이 있었는데 쿠바의 길거리에 처음 서있던 이 순간은 고개를 들라, 세상은 핸드폰 화면 밖에 있다라고 아바나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그렇지, 화면 밖엔 세상이 있었다.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삶이 있었다. 그걸 순식간에 느끼게 해준 그 순간, 물을 사러 가던 그 순간.

그런 순간이 나에겐 한번 더 생겼다.






처음 만난 아바나를 연신 구경하고 사진 찍으며 숙소로 들어가서 아이들에게 물을 주었는데, 공산주의의 물은 수돗물 맛이 강하게 났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물이 없으니 어떡하겠는가. 덕분에 물을 마시고 바로 화장실로 달려갈 수 있는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처음 마셔본 하바나 클럽의 끝은 끝없는 구토였다.

그리고 처음 마셔본 쿠바 물맛의 끝 역시 구토였으니,
끝과 끝은 맞닿아 있는게 틀림없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쿠바노들


친구들이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고, 정신 차린 친구들에게 옷을 입고 나가자고 했다.
늦은 아침점심겸 저녁이지만, 뭔가는 먹여야지 토할 거리가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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