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학생 푸념
나도 나름대로 상큼했던 그때. 나는 꿈 많고, 세상모르는 신입생이었다. 그 당시 나는 이제 막 복학을 한 선배들과 몇 개의 수업을 같이 들었다. 적게는 2살에서 많게는 4,5살까지 차이가 났던 형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다. 예상치 못하게 나는 포르투갈어를 전공으로 선택했고, 영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게 또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은 대단히 낯설었다.
기초부터 하나하나 배웠다. '나는 배가 고프다' , '나는 너를 좋아한다'와 같은 간단한 문장들을 배우고, 숫자 세는 법을 배우며 20살을 보내고 있었다. 일일이 손가락을 접어가며 숫자를 외우고 있던 어느 봄날, 내 옆자리에는 얼굴은 검게 그을리고 팔에는 근육이 울룩불룩한 형이 앉아 있었다. 물론 그도 신입생인 나처럼 열심히 손가락을 접고 있었다. 그 광경이 꽤나 우스꽝스러웠다. 그것은 일종의 조소였다. 나도 군대를 갈 것이며, 어쩌면 더 늦은 나이에 복학을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20살의 얄미운 생각이었다.
시간이 꽤 지났다. 입장을 바꿔 다시 그 자리에 앉았다. 그때 그 형만큼 팔에 근육이 울룩불룩하지는 않지만, 얼굴은 그럴싸하게 까맣다. 20살을 한참 지난 나는, 20살 친구들과 수업을 듣고 있다. 나도 예전에는 너희들처럼 항상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있었고, 학교에 오는 것이 즐거웠던 시간이 있었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수업은 원어 강의로 포르투갈어만 쓸 수 있다. 나는 벙어리다.
나는 이상해졌다. 생각이 많아진 나는 이상해졌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외운 것을 까먹는다. 외운 것만 까먹는 게 아니라, 외우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다들 그런 건지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잘만 외운다. 머리가 나빠진 걸까. 또 이상하게 자꾸만 배가 고프다. 훈련병 때 그랬던 것처럼 자꾸만 배가 고프다. 밥을 먹고 돌아서면 또 배가 고프다.
이상하게도 사고 싶은 것은 많은 데 돈은 없다. 멋진 옷을 사 입고 한껏 멋도 부리고 싶지만, 책값은 너무 비싸고, 교통비도 많이 들고, 밥 값도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한없이 집에 손만 벌리기에는 내 나이가 부끄럽다. 이상하게도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해야 할 것이 더 많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그에 앞서 꼭 해야 될 것들이 산재한다. 시간을 늘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동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잠을 줄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슬프게도 내 역량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포부와 야망으로 가득 찬 김병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얼마 전, 수업을 같이 들었던 그 복학생 선배와 통화를 했다. 번듯한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그에게 나는 내가 느끼고 있는 것들을 거리낌 없이 말했다. 이 시간을 먼저 겪은 그 선배에게 나 역시도 그 시간을 지나고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 고충을 토로하면서, 어쩌면 20살 때 어리석었던 조소를 용서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그가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리워진다고, 자기는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모든 새로운 시작은 어색하고 어렵고 또 불편하다. 모든 게 그랬고, 살아가면서 내가 하게 될 모든 일들이 그러할 것이다. 이 역시도 새로운 시작이니 당연히 어려운 것이겠지.
시간이 얼른 지나서 이 새로움에도 익숙해지고 싶다. 시간이 얼른 지나서, ‘그땐 그랬지’ 하고 웃으면서 말할 수 있기를. 그런 날이 내게도 무사히 찾아오기를 바란다. 수화기 너머의 형처럼, ‘그래도 그때가 좋았는데..’ 할 수 있는 날이 오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