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여기 우드컷 클래스
아주 먼 옛날, 그러니까 전두환이 담배 피우던 시절, 아닌 전두환이 평화의 댐으로 아이들 코 묻은 돈을 떼먹던 시절. 내 전자 오락실 돈도 떼 가고, 내 친구 뽑기 사 먹을 돈도 죄다 떼 가던 그 옛날!
그 옛날, 수업준비물이 판화 칼이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판화 칼을 가져오지 않은 친구들은 준비물을 챙기지 않은 죄로 교실 뒤로 가서 수업시간 내내 손을 들고 벌을 서야 했습니다. 그날 난 조용히 나의 판화 칼을 안 가져온 친구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교실 뒤로 나가 손을 들고 벌을 섰습니다. 하기 싫었으니까, 저걸 한 시간 동안 파고 있느니, 한 시간 동안 손들고 있는 게 더 편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랬던 판화를 해봅니다. 치앙마이 햇살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침부터 그 싫던것을 시작해 봅니다.
뚱뚱하고, 게으르게 생긴 젊은 선생님이 파고 싶은 것을 스케치하라고 합니다.
무엇을 그려야 할까? 무엇을 그려도 될까? 어디를 파고 어디를 남기는 걸까?
막상 판과 펜과 칼이 눈 앞에 떡 놓여지니 아무 생각도 나질 않습니다. 그 옛날 교실 뒤에서 손들고 있지 않았다면 대충이라도 알텐데... 당최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일단 스케치를 해봅니다. '이거 어때?'라고 하니 선생님은 다시 그리라 합니다. 뭔가 판화에 적합하지 않다임이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다시, 또 다시 그려 봅니다.
최종으로 허락받은 스케치, 스케치 허락받기까지도 한참이 걸립니다. 지금이 그 옛날 교실이라면 다시 뒤로 가서 손이나 들고 싶어집니다. 그래도 일단 펜을 놓고, 칼을 듭니다. 일단 시작을 했으니까. 시작을 해야 끝이 있으니까.
'서걱서걱'
칼이 나무를 가르는 소리가 꽤나 좋습니다.
시원시원합니다.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집니다.
'서걱서걱서걱...'
동그란 얼굴 선을 따라 둥글둥글 파나갑니다. 선생님이 갑자기 혼을 냅니다.
"칼은 직진으로 가야 해! 칼이 곡선을 그리면 칼날이 무뎌진다고!"
뚱뚱하고 게을러 보였던 선생님이 검객처럼 보입니다. 날씬하고 재빨라 보입니다.
그렇게 혼나는 것을 끝으로 오전 수업이 끝납니다. 선생님의 어머니가 식사를 대접해 주십니다.
지금껏 치앙마이에 와서 먹어본 카오소이 중 최고의 카오소이였습니다. 고된 노동 후의 꿀맛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 되었건 식당이었다면 바로 한 그릇 더 주문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최고의 식사를 하고 그의 작업실을 둘러봅니다.
나> 저 작품은 얼마나 걸렸어?
나> 저건 몇일 걸렸어?
나> 저건 몇달 걸린거야?
하루, 이틀, 일주일 , 이주일, 한 달, 두 달... 작품이 완성되는 동안 걸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겠지만 판화의 시간은 좀 다르게 느껴집니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세상이 잠들어도 계속되는 서걱서걱 소리, 그 소리가 작품에서 들리는 듯 합니다.
선생님은 오전 내내 나에게 말했습니다
"천천히 한컷 한컷, 즐겁게 한컷 한컷"
작품들을 보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하루 이틀 일주일 이주일 한 달 두 달, 천천히 한컷, 즐겁게 한컷,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두 달 내내 그렇게 즐거웠겠구나. 너는'
이 뻔한 이치가 가슴에 서걱서걱 새겨집니다.
서걱서걱 조금씩
서걱 서석 천천히
서걱서걱 즐기며
서걱서걱 6시간 동안
서걱서걱 손가락엔 물집이...
목판에 새겨진 웃고 있는 나를 보니 나도 웃음이 납니다.
'몇달 동안 무엇인가를 서걱서걱 완성했을 땐 얼마나 큰 웃음이 날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게 즐겁습니다.
시간이 만든 것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그것은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들 하니까 나도 했던 것들,
이기기 위해 싫어도 했던 것들,
그것들을 얼마나 오래 한들,
완성의 쾌감을 느낄수 있을까?
나의 지난 시간들은 하니까 하고, 싫어도 하고,
그저 버티는 맷집만 키우는 시간들이였습니다.
내 청춘을 다 받쳐 얻은 맷집보다 오늘 6시간이 만든 물집이 꽤나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솔직히 내 인생 물집 흔적 하나 없지만, 나는 오늘 즐겁습니다.
잘했건 못했건 내가 만든 완성품 하나 손에 꽉 쥐었기 때문입니다.
젊은것들에게 숙제 하나 남기고 갑니다. 아니 무조건 외웟!
"인생은 맷집이 아니라 물집!"
-어느 날 숙제 검사해서 못 외운 사람은 인생 뒷전에 가서 손들고 서있썻!
2018년 1월 어는 날 @chiangm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