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여기 반카페
어느 날,
ABC 초콜릿을 씹어 먹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요것이 A인지 B인지 C인지, 그 재미로 먹던 그 시절 그 설렘까지 씹어 먹고 있는 나.
한동안 나는 아재가 아니라고, 싫다고, 몰라 몰라 거부했지만 나는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감히, ABC 초콜릿을 씹어먹는 늙은 사내,
아재가 되어버렸다고.
사실 요즘,
무엇을 봐도 설레지 않고, 무엇을 해도 재밌지 않고,
누구를 만나던 그저 그때 그 사람, 어디를 가던 그저 그때 거기,
그래서 무작정 떠나기로 했습니다.
젊음과 예술과 디지털 노마드들의 천국, 치앙마이로!
내가 얼마나 아재인지,
젊은것들을 보며, 젊지 않은 나를 보며,
얼마나 구리구리 해졌는지,
적나라하게 비교해 보기로 했습니다.
뭔가 역발상
아직 죽지 않았어 ㅋ
'이 비행기 안에 나 말고 또 미친 척 혼자 떠나는 아재가 있을까?'
제주에서 김포, 김포에서 인천, 인천에서 방콕, 방콕에서 치앙마이
혓바늘이 돋았습니다.
입술이 터지고 머리가 아프고 콧물이 흐르고,
초겨울과 한겨울과 한여름을 넘나들기엔
아재란 그저 심리적 문화적 느낌적인 느낌적 문제가 아녔습니다.
미친 척이 아니라 미친 짓입니다.
개나 줘버리기로, ABC 초콜릿 따위 감성은 개나 줘버리기로 했습니다.
가는 도중에 이미 바닥난 체력은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가방에서 ABC 초콜릿을 꺼내 먹습니다. 꼭꼭 씹어먹습니다.
이제부터 정신력입니다.
여행을 정신력으로 이겨내야 하는 것,
아재란 그런 건가 봅니다.
이 공항 저 공항,
이 gate 저 gate,
대기하는 곳곳마다 각자의 선택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선택...
참 많은 것을 선택하며 살아왔습니다
그게 유일한 선택인 줄 알고 했던 선택, 때론 누군가 정해준 선택, 돌이킬 수 없던 선택, 피하고만 싶었던 선택,
선택조차 없던 선택, 정신 차려 보니 이미 정해버린 선택, 그게 정답인 줄 알고 했던 선택,
선택 그 자체가 참 피로했던 날들.
그런데 말입니다. 어느 날부턴가 선택지가 줄어들었습니다.
어느새 다 선택하고, 이미 다 결정된 느낌,
이젠 그냥 선택된 것들로 대충 버무려 살면 되는 느낌, 그런 삶.
하지만 최종 목적지 치앙마이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순간 짜릿해졌습니다, 심장이 막 요동쳤습니다.
'이 얼마만의 선택이었던가!
혼여를 선택하고, 내가 선택한 목적지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비록 쌍콧물을 흘리며 ABC 초콜릿을 꼭꼭 씹으며 당을 보충하고 있어도
이 얼마만의 선택인가! 이 얼마만의 선택이 있는 삶인가! 이 얼마나 설레는 삶인가!'
문득 대한민국 젊은것들에게 잔소리 함 던지고 싶어집니다.
아재를 넘어 꼰대라 불릴지라도
젊은 당신들에게 .
"선택이 많은 네 인생을 선택해. 더 이상 선택이 없는 안정적인 미래 따위는 꿈도 꾸지 마!"
치앙마이에 도착하자마자 이곳 반카페를 찾아왔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_
1. 이곳은 치앙마이 대학생(출신?)들이 만든 대학 후문 쪽 카페, 관광객보단 현지 학생들이 많은 공간이여서
2. 바로 숙소로 들어가면 왠지 아재스러워서, 숙소로 가면 아재들처럼 바로 쓰러져 잘것 같아서
일단 커피를 주문합니다.
노트북을 엽니다.
주문한 커피를 마십니다.
노트북을 그냥 열어만 둡니다.
뭔가 쓰고 싶었지만
뭔가 이 상태로 커피만 느끼고 싶어 졌습니다.
'캬~ 좋다. 술도 아닌 커피에 취할 줄이야... 이 기분 어쩔 거야'
문득 테이블 위에 고양이가 보입니다.
개팔자 상팔자, 그 위에 고양이 팔자가 있는 듯합니다.
묶여 있지 않는 그 팔자.
2018년 1월 어느 날 @chiangm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