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여기 치앙마이대학교
'충분히 게으르게 살고 있으니 바쁜 여행도 나쁘지 않겠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무슨 얘기냐면,
회사를 나오고(내가 버렸음ㅋ) 제주로 이주한 지 어언 4년 차, 그동안 참 게으르게 살았습니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자다 일하고, 일하다 자고 멋대로 맘대로 살았습니다.
진짜 게으르게 산 것은 아니지만, 하루에 3시간 정도 자며 머신처럼 머슴처럼 살던 도시의 하루하루에 비교하면
아무리 바쁘게 살아도 제주의 시간은 참 한량입니다.
삶에 찌든 사람들이 잠시 떠나 여유를 즐기는 것이 일반적인 여행이지만,
난 게으름에 찌들었으니까 잠시라도 바쁘게 시간을 보내기로 치앙마이와 약속을 해봅니다.
그래서 출근을 하듯 아침 일찍 일어나 젊은것들이 넘치는 곳, 치앙마이 대학을 향합니다.
일단 사내 식당, 아닌 학생 식당으로 향합니다.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는 학생들과 그런 학생들을 대 놓고 쳐다보는 나.
나> 너희들 먹는 게 뭐니?
학생들> 아이 캔 낫 스피크 잉글리쉬 깔깔깔
나> 엄.... 맛있니?
학생들> 예스 예스 깔깔깔
교복 입은 치앙마이 대학생들 사이에 어색하게 껴서 이방인 놀이를 시작해 봅니다.
같은 동양인인데, 그래도 외국인이 말 거는 것이 신기해서 웃는 건지. 내가 웃기게 생겨서 웃는 건지.
말만 하면 웃습니다. 그 모습이 참 이쁩니다.
25밧의 소고기 국수를 먹고 30밧의 커피를 들고 대학 곳곳을 돌아다녀 봅니다
여기도 깔깔깔, 저기도 깔깔깔, 스토킹 하듯 멀리서 그런 학생들을 지켜봅니다
처음엔 '참 젊다'를 느끼다가,
갑자기 '젊어서 좋겠다'로 서럽게 부럽다가,
결국엔 '이것들아! 너희도 곧 늙는다'로 기분 좋게 마무으리. 혼자 깔깔깔.
치앙마이 대학에 온 것은 젊은것들의 젊은 날들을 보고 싶은 이유도 있었지만
치앙마이 대학교를 검색하면 늘 등장하는 큰 호수를 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호수야 어디든 있지만 왠지 그냥 땡겼습니다. 막상 와보니 'oh my god~'
중국 관광객들이 떠드는 것만 빼면 완벽한 곳이었습니다.
참 좋은데 말로 설명할 길이 없는 그런 곳, 와서 직접 느껴야만 하는 그런 곳,
그래도 이 느낌을 사진에 담아야 하리, 이렇게도 찍어보고 저렇게도 찍어 봅니다.
'아 다른 렌즈가 필요해' '드론을 띄워야겠는데' '아 360이라도 있었으면'
무슨 회사 부장처럼 찍지도 못하면서 장비 탓만 하고 있습니다.
그냥 눈으로 찍고 가슴에 저장하기로 합니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그냥 한참을 바라봅니다.
뭐지 이 기분은?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눈물의 정체도 기분의 정체도 모르겠습니다.
아재가 되면 눈물이 많아진다고 해서, 드라마 볼 때도 이 악물로 눈물을 참았는데
이 순간은 참기도 전에 눈물이 흐릅니다. 진짜 아재가 되었나 봅니다.
눈물 닦고, 정신차리고 잔소리나 한마디 해봅니다.
젊은것들, 그중에 특히 수컷들에게
'남자도 울어도 돼! 울면 지는 거 아니었어. 안 울고 버티다 보니 결국 웃지도 못하더라고"
혼자 호수에 앉아 온갖 청승을 떨다가 길거리로 나와 무작정 걸어 봅니다.
덥다기보다 뜨겁고, 힘들다기 보단 애초에 힘없고, 치앙마이의 거리가 내게 굴욕함을 줍니다
차를 렌트할까? 스쿠터? 자전거? 그냥 다시 걷기로 합니다.
어떤 감성도 아니고 어떤 짠내도 아니고 도저히 좌우가 다른 곳에서 운전할 엄두가 안 납니다.
10년만 젊었어도란 말이 내 인생에 들어오는 순간입니다. 진짜 눈물 나는 순간이지 말입니다.
아재가 된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증상(?)이 있지만 그중에 하나는 겁이 많아지는 겁니다.
괜히 사고라도 날까 봐 그냥 다시 걷습니다.
한참을 걷다가 우연히 만난 길바닥 도라에몽,
'여기다 이거 그린 자식은 무슨 생각으로 그렸을까?'
'이 뙤약볕에 굳이 왜 여기에 쪼그려 앉아서 이걸 그리고 있었을까?'
'얼마나 한심한....'
생각이 멈춰졌습니다. 한심한...이라는 것부터.
나는 좋은 회사에 가지 않으면 한심한 인간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나는 경쟁에서 지면 한심한 인간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나는 멀쩡한 회사를 나오면서 나는 진짜 한심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피식 웃음이 납니다.
멀쩡한 회사에서 경쟁에 승자로 끝까지 회사를 계속 다니는 나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뙤약볕에 굳이 여기 쪼그려 앉아 도라에몽을 그리는 놈.
무엇이 맞고, 무엇이 좋고. 무엇이 옳고, 난 그런 거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이 순간 나는 너 놈에게 한 표를 던집니다.
적어도 너 놈은 나보다 행복하게 사는 것 같으니까.
2018년 1월 어느 날 @ chiangmai
* https://www.instagram.com/ki_d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