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여기 무에타이 링 위
참 생각이 없습니다. 무엇을 하든 일단 하고, 하다가 좋으면 더 하고, 하다가 싫으면 관두고,
나이가 들면 좀 생각 있게 살 줄 알았지만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생각 없음은 변하질 않습니다.
어디로 여행을 떠나든 여행도 생각 없이 떠납니다. 비행기표를 사면 그걸로 여행 준비 끝,
나머지는 현지에 도착해서 시작합니다. 잘 곳도 먹을 것도 갈 곳도 할 것도 그냥 그때그때
그게 좋습니다. 그게 편합니다.
하지만 이번 치앙마이를 오면서 딱 한 가지 계획한 것이 있었습니다.
무에타이!
나는 나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나는 맞으면 정신 차리는 스타일입니다.
그래서 무에타이!
맞다 보면 알 것입니다.
얼마나 약해졌는지, 얼마나 찌질해졌는지,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지.
그렇다고 더 강해지고 막 극복하고 막 이 악물고 그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약해진 나를 적나라하게 마주하고 싶었습니다.
맞을수록 아플 것이고 아플수록 울컥해질 것입니다.
진짜 울지도 모릅니다. 일단은 아파서 그다음은 쪽팔려서, 그래도 링에 올라보려 합니다.
땀이 눈물을 가려줄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선생님> ki, 잘하는데 어디서 배웠어?
나> 아니 나 처음인데
선생님> 리얼리? 그렇다면 더 놀라운데!
이제 갓 스물이 넘은 선생님이 몇 가지 기본자세와 서비스 멘트를 날리더니 바로 링으로 올라가랍니다.
심장이 뜁니다. 태어나 처음 올라가 보는 사각 링,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심장 두근거림입니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못했는데 이렇게 급하게 두들겨 맞을 생각 하니 급 현기증이 일어납니다.
보호장구를 풀 장착한 선생님이 올라오더니 글러브를 끼워 줍니다. 어린아이 벙어리장갑 끼워 주듯.
나> 글러브만? 난 보호 장구 안 줘?
선생님> 응! 넌 때리가 만 하는 거야
아무리 내가 수업료를 내고 링에 올라왔어도 그냥 때리라니, 내가 뭔가 나쁜 짓을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내가 수업료를 냈었도, 내 앞에 피부도 곱고 나보다 작고 나보다 야리야리한 선생님을 때리기만 하라니
돈의 갑질도 아니고, 이건 아니다 싶어 그냥 툭툭 잽만 날립니다.
"ki 더 세게 더 더 더, 더 세게! 더 세게!"
짜증날 정도로 하도 더 세게 때리라 해서 한번 풀 파워로 날리면 그만 하겠지 싶었습니다.
그래서 크게 한번 휘둘렀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말씀하십니다.
"ki, 풀 파워로 해봐. 더 세게! 더 세게!"
뭡니까? 방금 온 힘을 다해 울트라 수퍼 파워로 때렸는데 풀파워로 안 한다고 혼을 냅니다.
당황이란 이런 순간을 말하는 건가 봅니다.
죽도록 맞으러 와서 죽도록 때리고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1라운드...
2라운드...
3라운드...
그렇게 처음엔 울트라 슈퍼 파워로 때리다가,
중간엔 남은 힘으로 때리다가,
마지막엔 팔다리가 겨우 흐느적 흐느적.
나는 온 힘을 다해 때렸고,
그는 온몸으로 받아냈고,
나는 온 힘이 빠졌고,
그는 온몸이 온전합니다. 무서울 정도로.
'맞아야 얼마나 약한지 알 것이라 생각했는데
때리다 얼마나 약한지 알게 되다니!'
나는 나이만 아재고 아직도 세상 이치도 모르는 벙어리장갑 낀 어린아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늘 억울했습니다.
늘 최선을 대해 살았고, 결코 져본 적 없는데 왜?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 억울하기만 했습니다.
결국 나는 사표를 냈고, 더 이상 최선을 다하는 삶이 싫어졌다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나는 오늘, 그것이 아니였음을 알았았습니다. 링 위에서
지금 이 순간 어느 곳에서 최선을 다해 죽도록 삶을 살아내는 젊은것들에게
또 잔소리 하나 납깁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더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건 나도 몰라. 단지 지치지 마. 마지막 라운드 종이 울릴 때까진"
링!
좁고, 숨 막히고, 긴장되고, 누군가를 쓰려 뜨려야 하는 곳,
누군가는 쓰러져야 하는 곳, 잔인한 곳이라고 생각하다가...
링!
좁지만, 숨 막히지만, 긴장되지,만 쓰러뜨려야 하지만, 쓰러질 수도 있지만,
아무나 못 오르는 곳, 매력적인 곳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지금 링에서 내려왔지만 오늘 밤 그 시절, 그 링위를 꿈꿔볼까 합니다.
죽도록 때리기만 했던 바보 같던 그 시절을.
2018년 1월 어느 날 @chiangm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