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투와 자기 발견의 여정

by 은파
인간은 미래의 다양한 가능성에 직면하여 스스로 기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나는 매일 아침, 정체성의 상징과도 같은 회사 ID 카드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는 도구인 펜을 쥐고 일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나만의 독특한 춤을 춘다. 사무실의 차가운 형광등 아래에서 보내는 시간,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받아들인 엄연한 현실이다. 끝없이 쌓여가는 복잡한 서류 더미와 긴장감이 감도는 회의실, 그리고 동료들과 나누는 진솔한 대화들, 이 모든 것들이 나를 근본적으로 정의하는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내 존재의 전부는 아니다. 또 다른 차원의 삶이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퇴근 후의 시간, 그리고 깊은 사색이 가능한 주말의 고요함 속에서 나는 전혀 다른 모습의 내면적 자아를 만나게 된다. 창작의 열정을 담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들, 하얀 백지 위를 자유롭게 달리며 무한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반짝이는 펜 끝, 그리고 그 속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무한한 상상의 세계. 이 특별한 공간에서 나는 한 명의 작가로 존재한다. 이렇게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두 세계 사이에서 나는 때로는 깊은 내적 갈등을 겪기도 한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회사 업무에 쫓기면서도 시들지 않는 글쓰기에 대한 강렬한 열망 때문에 때로는 깊은 고뇌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바로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나'라는 고유한 존재의 본질이다. 그 누구도 강요하거나 강제하지 않은, 오직 내가 진심으로 원해서 스스로 선택한 소중한 삶의 여정인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 광활한 세상에 아무런 선택권 없이 홀연히 던져진 존재에 불과하다.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 사르트르는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조건을 '피투성(被投性)'이라는 심오한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처럼 피투된 존재로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미리 정해진 목적도, 존재 이유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자유를 부여받게 된다. 인간은 끊임없이 펼쳐지는 미래의 다양한 가능성 앞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끊임없이 기투하는 역동적인 존재이다. 우리의 삶은 이러한 주체적인 선택과 능동적인 기투에 의해 매 순간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사르트르의 심오한 철학적 통찰을 통해 내 삶의 의미와 방향성을 진지하게 돌아보았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안정적인 직장인의 삶을 살면서도 동시에 창작에 대한 뜨거운 열정에 모든 영혼을 바치며 살아가고 있다. 치열한 직장 생활의 한복판에서도 끊임없이 글을 쓰는 작가적 자아를 잃지 않고 있으며, 이 두 가지 정체성을 조화롭게 아우르는 새로운 나를 만들어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기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직업적 구분이나 역할의 분담을 넘어서는, 나만의 독특한 존재 방식이자 진정한 나 자신을 끊임없이 완성해 나가는 창조적인 여정이다.

규칙적이고 안정된 직장 생활은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지위를 제공하지만, 그러한 세계 안에만 갇혀있는 것으로는 나의 본질적인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다는 깨달음이 있었다. 나는 창작적 글쓰기를 통해 깊은 내면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세상과 진정성 있게 소통하면서, 나만의 독특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 나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세계가 어떻게 하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하면서도, 어느 한쪽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붙잡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이중적 삶의 과정이 순탄하고 편안한 것만은 아니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정체성을 동시에 지니고 산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깊은 내적 혼란과 갈등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창조적 긴장이 없다면 내 삶은 아마도 단조롭고 불완전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때로는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치기도 하고, 두 세계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순간적으로 잃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굳건한 의지로 다시 일어서서 이 두 세계 사이의 절묘한 균형점을 끊임없이 찾아 나간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되는 실존적 불안과 내적 혼란, 그리고 동시에 맛보게 되는 창조적 성취감과 깊은 만족감이 바로 내 고유한 삶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길고 고단했던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나만의 작은 서재 책상 앞에 조용히 앉으면, 나는 마치 마법의 문을 통과하듯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간다.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선택한 단어들에 내 영혼의 진실을 담아 글을 써 내려가면서, 그 과정을 통해 매일매일 새로운 나를 창조해 간다. 이러한 끊임없는 창작의 과정에서 나 자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현재의 한계를 넘어 더 넓은 미래의 가능성을 상상하고 그것을 하나씩 실현해 나간다. 내가 쓰는 글 한 편 한 편이 곧 나의 새로운 모습이자, 무한한 가능성의 현현이기 때문이다.

물론 매일매일의 글쓰기 과정은 쉽지 않은 고난의 여정이다. 때로는 과중한 직장 업무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극에 달해 단 한 줄의 글조차 쓸 수 없는 날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글쓰기는 단순한 취미나 부업이 아닌, 내 삶의 가장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깊이 있게 통찰했듯이, 우리는 이 세상에 그냥 던져진 존재로서 우리만의 고유한 본질을 끊임없이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나는 이러한 창조적 글쓰기를 통해 나의 진정한 본질을 깊이 탐구하고, 나 자신을 더 높은 차원으로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이러한 치열한 창작의 과정에서 나는 진정한 의미의 실존적 자유를 발견하게 된다. 글쓰기는 나에게 그러한 근원적 자유를 한없이 제공해 준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깊은 내면의 참된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복잡하게 얽힌 나의 감정과 생각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다. 이러한 자기 성찰의 과정은 나에게 무한한 만족감과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선사한다. 더욱이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쓴 글들이 혹시라도 다른 이들에게 작은 위로와 새로운 영감을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할 때면, 더욱 큰 창작의 열정이 솟아오르곤 한다.

이것이야말로 사르트르가 깊이 통찰한 의미의 기투라고 할 수 있다. 주어진 현실이라는 한계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만의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해 가는 역동적인 과정. 때로는 극심한 고통으로 힘들고 때로는 깊은 혼란에 빠지기도 하지만, 이러한 끊임없는 자기 창조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숭고한 모습이 아닐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우리는 모두가 각자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이 세상에 홀연히 던져진 그 자리에서, 과연 어떤 미래를 향해 나 자신을 온전히 던지고 있는지 끊임없이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각자만의 독특한 춤을 추고 있다는 깊은 진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비록 그 춤이 때로는 어색하고 서툴러 보일지라도, 그것이야말로 각자에게 주어진 진정한 인생의 모습이다.

직장인이자 동시에 작가라는 이중적 정체성을 지닌 나는 오늘도 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나만의 춤을 춘다. 이 독특한 춤이 언젠가는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어낼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나는 계속해서 나만의 고유한 삶을 향해 힘차게 기투하고 있다. 광활한 인생이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서, 우리는 모두가 우리 자신만의 주인공이다. 때로는 주어진 현실 속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의 역할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것. 그것이야말로 실존이 가진 묘미일 것이다.

이러한 여정이 때로는 외롭고 힘들게 느껴질 때도 있겠지만, 이것이야말로 내가 선택한,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선택해 나갈 나만의 고유한 삶의 방식이다. 이 두 세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 곧 나의 실존이며, 이러한 치열한 고민과 선택의 연속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자아실현일 것이다. 매일 아침 회사로 향하는 발걸음과 매일 밤 책상 앞에 앉아 펜을 잡는 순간, 매번 새로운 나를 만나고 또 다른 나를 창조해 간다. 이것이 바로 내가 선택한,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선택해 나갈 나만의 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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