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우연성

by 은파
모든 존재는 우연히 발생하여 존재한다.


어느 무료한 일상의 오후, 나는 점점 무겁게 다가오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한 일시적 탈출구로 영화관을 찾았다. 고요한 영화관의 깊은 어둠 속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는 그 순간, 나는 일상의 혼란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우연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영화가 선사하는 완벽한 필연성의 세계에 온전히 안겨 있었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직전, 나는 문득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 철학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사르트르는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우연성을 끊임없이 강조하며,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런 이유나 목적 없이 그저 우연히 출현한 존재에 불과함을 냉철하게 상기시켰다. 그러나 내가 지금 몸을 맡긴 영화 속 세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영화 속에서는 모든 요소와 순간이 감독의 세심한 의도와 계획에 따라 철저히 필연적으로 진행된다. 배우들의 의미 있는 대사 하나하나, 그들의 미세한 움직임, 장면과 장면 사이의 매끄러운 전환 등 스크린 위의 모든 것은 정교하게 계산된 계획 아래에서 의미 있게 이루어진다.

영화가 시작되고 화면이 밝아지자 나는 점차 그 매혹적인 화면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갔다. 주인공의 운명은 시나리오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주인공이 조심스럽게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 그의 모든 선택과 행동은 철저히 감독의 섬세한 손길 아래에서 확고한 필연성을 띠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사건들은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었고, 그 단단한 구조 안에서는 어떠한 우연성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인간 실존의 덧없는 무상함과는 너무나도 달리, 이 영화 속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목적과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내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의 무질서한 우연성과는 극명한 대조를 경험하는 특별한 순간이었다.

영화가 차분히 진행될수록 영화가 선사하는 아름다운 필연성의 세계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주인공이 위기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하여 극적으로 벗어나고, 운명의 상대를 만나 진실한 사랑을 찾아가는 모든 과정은 마치 정교하게 설계된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맞물려 부드럽게 돌아갔다. 나는 그 질서 정연한 세계 안에서 이상하게도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확신, 다음에 일어날 일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안정된 세계 속에서 느끼는 특별한 안락함. 그러나 이러한 편안한 감정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다. 120분의 영화가 끝나면 나는 어김없이 무질서하고 예측 불가능한 우연성의 현실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냉혹한 사실을 마음 한편으로는 계속 인식하고 있었다.

마침내 영화가 끝나고 제작진 자막이 올라가자, 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천천히 영화관을 나섰다. 어둡고 안락했던 영화관의 포근한 공간에서 벗어나 밝고 번잡한 거리로 나오는 순간, 나는 즉시 우연성이 지배하는 현실 세계에 다시금 던져졌다. 분주한 거리에는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오가고 있었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무작위로 흩어져 정신없이 달리는 자동차들, 이렇듯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이 갑작스럽게 나를 맞이했다. 영화관 안에서 경험했던 따뜻한 필연성과는 달리, 이 현실의 거리에서는 모든 것이 우연성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한 아이가 갑작스럽게 길을 건너려 하다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바로 그 찰나의 순간, 한 대의 검은 승용차가 예고 없이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만약 그 아이가 우연히 그 순간에 멈추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러한 불편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을 날카롭게 스쳤다. 그 우연한 순간의 선택이 아이의 소중한 생명을 구한 것이다. 이렇듯 거리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우연성이 매번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낯선 사람들 간의 짧은 만남과 영원한 헤어짐, 그들의 환한 웃음과 슬픈 눈물 — 이 모든 것은 우연성의 산물로, 미리 정해진 의미나 어떠한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발걸음을 옮기며 길을 걷는 동안, 내 존재도 결국은 이러한 우연성의 단순한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내가 지금 이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내던져져 있다는 것은 어떤 신성한 필연성이나 거대한 계획에 의해 결정된 것이 절대 아니다. 나는 그저 우연히 지금, 이 장소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사르트르가 평생 강조했던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우연성에 깊게 빠져들었다. 인간 실존의 덧없는 무상함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는 어떤 정해진 인간 존재의 필연적인 의미나 특별한 목적도 부여받지 않은 채 이 광활한 세상에 그저 내던져져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고유한 의미를 적극적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약 1시간 정도 생각에 잠긴 채 목적 없이 길을 걷다가, 나는 우연히 오랜 친구와 마주하게 되었다. 서로 연락이 끊긴 지 이미 오래된 사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얼굴을 마주친 적이 없는 관계였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우연한 만남이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비밀스럽게 예고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우리의 이 만남은 분명 미리 계획되거나 필연적으로 정해진 것이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우연성이야말로 인간 실존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이고, 그 자유로운 우연성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실존적 자유를 깊이 경험하게 된다. 이런 뜻밖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우리는 과거의 소중했던 관계를 새롭게 재해석하고, 함께하는 미래를 다시 설계할 기회를 얻게 된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우연성 속에서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끊임없이 창조하고, 그 능동적인 과정에서 자신만의 본질을 찾아갈 수 있다고 통찰했다.

북적이는 거리의 소음 속에서 나는 문득 작은 미소를 지었다. 영화관에서 느꼈던 안락한 필연성과 현실 거리에서 마주한 우연성, 이 두 극명하게 대비되는 세계는 나에게 사르트르의 심오한 철학을 직접적으로 생생하게 체험할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필연성의 세계에서는 일시적인 안락함과 평온함을 느꼈지만, 인간 실존의 본질적인 무상함과 우연성은 오직 현실의 거리에서만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우연성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나만의 고유한 의미를 적극적으로 찾아가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를 깨달았다.

나는 다시금 활기를 되찾으며 길을 천천히 걸었다. 이번에는 불확실한 우연성 속에서 필연적인 의미를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과정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인간 실존의 가장 깊고 본질적인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우연히 이 세상의 특정한 시공간에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 스스로 의식적인 선택과 능동적인 행동을 통해 우리만의 고유한 의미를 창조해 나갈 수 있는 특별한 존재들이다. 그것이 바로 사르트르가 평생을 통해 강조했던 우연성의 진정한 가치일 것이다.

나는 잠시 한적한 공원의 벤치에 앉아 내 삶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우연히 마주치게 될 다양한 사람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들 속에서 나만의 독특한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써 내려가기로 굳게 결심했다. 그 과정에서는 분명히 혼란스러운 우연성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의미 있는 필연성으로 가득 찬 새로운 세계가 차츰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진정한 실존적 자유와 책임을 온전히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책임의 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