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존재는 잉여존재에 불과하다.
어느 흐린 오후, 나는 카페의 고요한 창가에 홀로 앉아 있었다. 무심코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잔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이상하고 낯선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 순간, 나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소설 '구토'에서 주인공 로캉탱이 느꼈을 법한 그 기묘하고 불편한 감각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커피잔은 그저 거기에 존재할 뿐이었다.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의미도 없이. 그것의 존재가 갑자기 너무나 생경하고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도대체 왜 이 잔은 여기에 있는 것일까? 왜 하필 이런 모양, 이런 색깔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 끝없는 물음들은 마치 영원히 반복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나를 어지럽게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는 명료하게 깨달았다. 이 무의미한 커피잔처럼, 나 역시 그저 여기에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특별한 이유도, 목적도, 의미도 없이 말이다. 나의 존재는 이 무심한 세상에 그저 여분으로 덧붙여 존재할 뿐이었다. 나는 한마디로 잉여 그 자체였다. 이 충격적인 깨달음은 마치 거대한 해일처럼 순식간에 나를 덮쳤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조여오는 듯했다. 내 주변의 모든 것들 - 나무 테이블, 금속 의자, 창밖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나무들,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 - 모두가 갑자기 낯설고 불안한 존재로 느껴졌다. 그들 역시 모두 여분의 존재였다. 우리는 모두 아무런 필연적 이유 없이 이 세상에 우연히 덧붙여진 잉여 존재들에 불과했다.
갑자기 심한 현기증과 메스꺼움이 느껴졌다. 이것이 바로 로캉탱이 소설 속에서 강렬하게 느꼈던 그 '구토'였을까? 존재의 우연성과 무의미성을 직면했을 때 찾아오는 이 불편하고 압도적인 감각. 나는 서둘러 화장실로 달려가 차가운 물을 얼굴에 여러 번 끼얹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도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누구인가, 이 거울 속의 낯선 사람은? 왜 하필 여기에 존재하는가? 어떤 필연적 이유가 있는가?
천천히 카페로 돌아와 자리에 다시 앉으며,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일상에 평화롭게 몰두해 있었다. 그들은 과연 이 잉여존재의 근본적 진실을 전혀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모른 척하며 살아가는 걸까? 갑자기 세상의 모든 것이 부조리하고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도대체 왜 이렇게 열심히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는 걸까? 어차피 우리의 존재에는 미리 정해진 선험적인 의미가 전혀 없는데. 우리는 그저 우연히, 이유 없이 여기에 있을 뿐인데.
하지만 바로 그 혼란스러운 순간, 나는 또 다른 중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 근본적인 무의미성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이자 자유가 아닐까? 미리 정해진 의미나 목적이 없다는 사실은, 결국 우리가 스스로 그 의미를 창조하고 만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나는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가방에서 펜을 꺼내 노트에 이 경험을 글로 적기 시작했다. 이 특별한 순간, 이 실존적 경험을 생생하게 기록하는 행위. 그것이 바로 내가 선택한 나만의 의미 만들기였다. 잉여존재로서의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 매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그리고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그 선택과 행동의 연속이 바로 우리 인간의 진정한 삶이다. 이 깨달음은 무척 무겁게 다가왔지만, 동시에 기묘하게 가벼워졌다.
커피를 다 마시고 카페를 나서며, 나는 회색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린 하늘 사이로 희미하게 빛나는 햇살이 간간이 비치고 있었다. 그 빛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이유 없는 잉여존재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다. 북적이는 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나는 주변의 모든 사물과 존재들을 완전히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우연적이고 불필요해 보였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이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집에 돌아와 조용한 창가에 홀로 앉아, 나는 오늘의 낯설고 강렬한 경험을 깊이 곱씹어보았다. 현기증과 구토의 감각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었지만, 이제 그것은 단순한 불편함이나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진정한 실존을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힘이었다. 잉여존재로서의 나. 그것은 저주인 동시에 축복이었다. 나는 이제 내 삶의 모든 순간과 선택을 완전히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밤이 점점 더 깊어질수록, 나는 이 새로운 실존적 깨달음에 조금씩 더 익숙해졌다. 현기증과 구토의 감각은 여전히 희미하게 남아있었지만, 이제 그것은 나를 두렵게 하거나 무기력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나를 더욱 깨어있게 하고 생생하게 하는 힘이 되었다. 잉여존재로 살아가는 삶. 그것은 끊임없는 자기 창조와 의미 부여의 과정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수많은 불빛을 바라보며, 깊이 생각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잉여존재라면, 그래서 우리 인간이 참으로 자유롭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세상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까?
내일이 밝아오면, 나는 다시 한번 이 잉여존재의 복잡한 세계로 용기 있게 나아갈 것이다. 때때로 현기증과 구토를 느끼면서도,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그리고 나만의 고유한 의미를 끊임없이 창조해 가는 과정이야말로 사르트르가 말했던 진정한 실존적 삶의 모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