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거 Sep 09. 2020

하얀 절벽

너는 나를 구원하라. (photo by Netflix)

바다 저 편의 작은 섬과 그 주위에는 늘 폭풍이 몰아친다. 결코 해가 뜨지 않으며 어떤 바다보다 차다. 누구의 접근도 거부하며 그 작은 빛도 그쪽을 향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 무엇이 존재함을 알 수 있는 까닭은 깎아지른 하얀 절벽이 바다를 찢고 솟아나 희미하게 빛나기 때문이다. 하릴없이 저 벼랑을 향해 헤엄치는 가여운 것에게 한 번만 눈길을 줄 것을 바란다. 누구도 바라지 않지만 저 가여운 것은 그곳을 향해 헤엄친다. 절벽에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바다는 끝없는 타락의 색이다.


빽빽이 검은 물이 들어찬 바다를 향해 걸어 들어가는 내 뒷모습과 지금 딛는 이 걸음과 내쉬는 날숨마저도 저기 저곳의 내 신앙을 증명하고 신에 도달하기 위한 순교자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끝도 없는 괴로움을 기꺼이 감내하기를 소망한다. 거기서 너는 나를 오라 한다. 너는 갓 태어난 아이의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가혹하리만큼 어두운 그 눈으로 더이상 나를 재촉하지 말라. 나는 이미 그 눈을 본 순간부터 네게 사로잡힌 이단의 광신도다. 내게 주어진 사명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대가 있는 곳에 도달하여 신앙을 증명하는 것. 네가 서 있는 그곳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위 솟은 희게 솟은 바위다. 이미 거친 하늘 아래 모든 것을 고르게 할퀴는 바람이 거세지만, 왜 너는 고요한가. 왜 네 머리카락조차 가만히 머물며 어깨와 발끝은 그리 단정한가. 이미 내 신앙을 온전히 소유하고서도 무엇을 더 바라는가.


나는 무척 괴롭다. 나는 네게 수없이 사랑을 고백해왔다. 슬픈 눈을 하고 너 또한 나를 사랑한다는 그 말이 끝없이 내 목을 조른다. 네게 닿기 위해 몸을 담근 바다는 차갑다. 순교자의 진군가를 부르며 무거운 물을 헤치며 간다. 허우적거리며 나아가는 사지를 휘감는 물의 절반은 눈물이다. 처음 네게 닿고자 했던 날부터 지금까지 흘린 내 눈물이며, 나를 바라보며 흘린 네 눈물이다.  너에 대한 내 갈증은 나를 끝없이 표류하게 만든다. 네가 만든 어두운 바다의 끝에서 결국 마주하는 것은 네가 있는 그 흰 절벽이다. 넓고 황량한 바다 위 손바닥만 한 바위섬의 절벽 꼭대기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너무나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희미한 절벽과 또렷한 검은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너는 왜 내게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내가 끝없이 너를 사랑한다 고백하기를 강요하며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야 마는가.


네 모든 것은 나에게만 허락된다는 것을 온 세상이 알고 있다. 나는 하얀 바위 절벽을 향한 광신도이며 오직 나만이 그 절벽에 닿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네 눈을 제외한 모든 것은 나를 지극히 사랑함을 나는 안다. 네 목덜미의 냄새를 맡을 때면 온몸이 저릿할 정도로 달콤한 향기가 나며, 네 머리카락의 감촉은 봄바람의 향긋한 그것이다. 신의 빛은 오히려 내게는 형벌과도 같았다. 그는 내 모든 더러운 것들을 드러내 고백하기를 바랐다. 내 이면은 너무나 추악하며 원죄보다 더러웠다. 신의 사랑을 받기 위한 조건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너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며 오로지 너를 향한 사랑만을 바랐다. 내게 허락된 것은 빛이 아닌 어둠이었으며 너는 그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빛나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러나 너는 내가 괴롭기를 바란다. 오로지 너만이 나를 위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런 탓인지 세상은 내게 가혹하다. 폭풍 아래서도 너는 평안하나 내 살갗은 온통 찢긴다. 무겁고 검은 물에 젖을 대로 젖은 내 가죽은 온통 피투성이 넝마다. 나를 사랑한다 말하지만 그 눈은 거짓임을 느낄 때마다 물은 내 목을 조른다. 괴로움에 가슴은 바싹 타들어가지만 눈물은 마르지 않아 바다를 이루어 나를 막는다. 내 고통을 바라는 네 염원은 너무나 커서 태양조차 사라졌다.


너는 악마다. 너를 향한 내 신앙은 영원히 고통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눈이 내게 사랑한다 하는 순간을 포기할 수 없다. 이미 나는 지독한 악마에게 길들여진 이단의 신자일 뿐이다. 내 신앙의 완성은 악마조차 웃게 할 타락의 절정이다. 그러나 그 길은 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보다 고통스러우며, 이미 나는 돌이킬 수 없다. 내게 구원은 없다. 그러나 나는 타락의 끝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으리라. 폭풍 아래 하얀 절벽에 올라 피보다 붉은 입술에 입 맞추리라. 악마를 향한 순교자의 기도는 절망의 끝에서 진실한 미소로 보답받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꿈의 역사 #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