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거 Jun 17. 2020

꿈의 역사 #7

라떼 말고 그때

피부가 또 말썽이다. 이번엔 손등이다. 늘 튼튼하고 건강한 줄만 알았지만 아니다. 특히 피부가 늘 말썽이다. 이십 대 중반 무렵 갑자기 찾아온 성인 아토피에 이어 이젠 건조한 계절만 되면 한 차례씩 피부에 가려움증이 생기곤 한다. 세월이 야속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그것 말고는 딱히 댈 핑계도 없다. 이런저런 피부 질환에 대한 나만의 대처방법을 익히며 괴로움을 피하는 것이 하나도 즐겁지 않다. 


메마른 공기를 마시는 것이 싫다. 하루하루가 메말라 가는 것만 같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른 이들의 행복감을 위해 일하는 것의 보람은 사라진 지 오래다. 나와 두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서 행복을 누리는 저들을 보는 내 시선이, 그들의 행복을 위해 이바지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을 때 처음 느꼈던 감정이 변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저들의 행복이 고취될수록 나는 그렇지 않다. 


바다까지 건너 행복을 찾으러 왔건만 수년이 지나도록 삶은 팍팍하기만 하다. 아무리 애써도 나는 그저 이방인일 뿐이다. 같은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나는 더욱 동떨어진 존재다. 그들이 보는 가까운 미래의 행복이 내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당연한 행복이, 적어도 안정된 삶이라는 것이 내게는 전혀 와 닿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어느 한 군데 의지할 곳 없는 외톨이라는 사실은 취하지 않고서야 쉽게 잠에 들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이러한 불안, 좌절, 피로, 외로움 등은 내 정신을 갉아먹는다. 흔히들 말하는 헬조선을 탈출하면 적어도 지옥은 아니리라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지옥불을 먹고사는 짐승인지 모르겠다. 오히려 이곳의 한적하고 평안한 분위기는 내가 속할 곳이 아니리라. 이러한 생각에 닿는 것 또한 이미 지칠 대로 지친 탓일지도 모르나, 이미 늘어놓은 대로 나는 심히 지쳤고 고단하다. 


문득 어제 전우에게서 잘 지내냐는 연락이 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전우다. 입대 날짜까지 같은 데다 같은 부대에 전입되어 전역 날까지 같이 2년 남짓한 시간을 꼬박 같이 보낸 녀석이다. 왜 좋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입때까지도 꾸준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때때로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 이런 시기에 연락이 와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늘 그렇듯이 그 시절 이야기를 하게 된다. 우리가 속해 있던 부대의 임무 탓에 우린 바닷가로 자주 출동을 나갔고, 나갔다 하면 적어도 1주일은 소속 부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지내야 했다. 보직도, 임무도 같았고 같이 출동도 여러 차례 나갔다. 


특히 바닷가는 정말 아름다웠다. 전라남도의 여러 곳을 다녔지만 고흥의 한 오래된 소초에서 거의 한 달 가까이 지냈던 적이 있다. 생활관으로 쓰이던 매우 작고 허름한 건물 문을 열면 낭떠러지가 코앞이고 그 앞에 남해가 출렁였다. 이십 대 초반이던 우리는 일과가 끝나고 그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내가 먼저 잔디밭에 앉아 있으면 녀석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옆에 앉았고, 녀석이 담배를 물고 앉아 있으면 내가 음료를 들고 가기도 했다. 아침저녁으로 뜨고 저물며 부서진 햇살은 바다를 온통 뒤엎었다. 금빛으로 부서지며 저만치 밀려가는 바닷물과 스르륵 풀어지며 멀리 흩어져가는 담배연기를 바라보곤 했다. 그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분명히 시답잖은 것들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오매불망 바랐고 하루가 무사히 지나갔음에 안도했던 때였다. 파도는 철썩이며 낭떠러지의 바위를 핥았고 우리는 다가올 미래를 기대했다. 


짧은 문자 상의 대화였지만 우린 역시나 그 시절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시절을 함께 보낸 다른 녀석들의 결혼 소식. 그 시절의 일들을 왁자지껄 소란을 떨며 모조리 꺼내놓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사실 얼굴을 못 본 것도 이미 너무 오래 지났다. 보고 싶다는 녀석의 말에 정말로 코끝이 찡했다. 녀석의 뿔테 안경과 코웃음, 흡연 등이 나도 너무 그립다. 서로 아프지 말라며 그래야 나중에 만날 수 있지 않겠냐며 우리는 대화를 이어간다. 


그 시절 우리가 다녔던 곳을 꼭 함께 다시 가보자는 약속을 했다. 돌이켜보면 우스운 약속이다. 우리는 이제 주변이라면 몰라도 그곳에 갈 수 없는 신분이다. 너무나 뻔하지만 이 말을 꺼낼 때는 함께 그곳을 돌아다닐 생각에 못 간다는 사실 따위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는 본인이 근무했던 곳이 지옥이지만 적어도 나와 그 녀석에게 그곳들은 추억할 만한 곳이다. 먼저 그런 이야기를 꺼내 준 것이 진실로 고맙다. 그 시절이 힘들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함께 기억하고 싶은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로 다시 간다면 그 시절 우리가 보던 그 바다를 다시금 보고 싶다. 여전히 황금빛으로 부서진 바다의 껍질이 서로 어깨동무하고 저만치로 밀려가는 그 모습을 꼭 보고 싶다. 


녀석은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는데 다시 일하러 간다며 또 연락하자고 한다.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로스쿨을 준비하더니 이내 변호사가 되어 로펌에 취업한 녀석이다. 하지만 자정이 넘었어도 아침에 있을 미팅을 위해 여전히 퇴근을 못한 것이었다. 녀석이 그곳이 지옥이라면 진짜 지옥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고 안쓰러운 마음으로 다음을 기약했다. 나 또한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육체노동을 한 탓에 고단했으니 서로를 안타까워하며 우리의 행복을 바라는 것 밖에는 이렇다 할 도리가 없다. 


돌이켜보면 지나온 모든 일들은 아름다웠다. 모두 행복하진 않았으나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하겠다. 그러나 시간은 오로지 나에게 한 방향만을 허락하며 과거는 주어진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힘을 가끔씩 보탤 뿐이다. 그러나 지금의 내게는 모든 것이 희미하다. 내가 바위처럼 주저앉는다 해도 누구의 비난도 받지 않을 테다.


하지만 아직은 그럴 뜻은 없는 것 같다. 여전히 아침에 눈을 뜨면 그래도 일터로 나가 내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지금 딛고 있는 낭떠러지에서 언젠가는 뛰어내려 저 먼 곳으로 밀려갈 것이다. 언젠가 해가 뜨는 그곳에 다다르면 지금처럼 지금을 떠올릴리라. 

작가의 이전글 꿈의 역사 #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