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계절

여름, 여름, 여름 그리고 또 여름

by 키치니

나는 여름을 좋아한다. 내 생일이 8월이라 그런지는 모르겠다. 남들보다 더위를 잘 견디는 편이고, 쨍쨍 내리쬐는 햇빛을 좋아하는 게 타고난 것인지는. 초록 이파리가 무성해진 나무를 보는 것이 즐겁고 산이든 바다든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계절도 여름이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외출하는 것도 좋고 피부가 까맣게 그을리면 예쁘다고 생각한다. 자두, 복숭아, 참외 같은 여름 과일이 제일 맛있고, 무엇보다 여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찰옥수수의 계절이기도 하다. 여름이 되면 종강 후 다녀왔던 엠티의 설렘과 추억도 여전히 기억한다. 하지만 요 몇 년 사이는 좋다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여름이 힘들었다. 숨 막히는 무더위 속에서 사람들은 매년 "올해가 앞으로 있을 여름 중 가장 시원했던 여름이래." 하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인도네시아에 오기 전, 그저 동남아시아 중 하나라고 생각한 이곳이 케냐나 브라질처럼 적도에 걸쳐있는 나라라는 것을 알고 적잖이 놀랐다. 지구를 반으로 가로지르는 적도라니. 태양과 가장 가까운 그곳은 얼마나 더울까. 빨갛게 달아오른 지표면의 열기로 멸치처럼 말라비틀어져 버리는 건 아닐까. 적도에 선 나를 상상하니 길 위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된 것처럼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비라도 내리면 도시 전체가 커다란 한증막이 되어 찜통 속에 있는 기분을 느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놈의 온난화로 한국도 이 정도인데 최고 기온에 몇 도를 더해야 그곳의 더위를 가늠할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가 여름을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였다.


원래 닥치면 좋게 생각하기 마련이다. 적어도 옷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겠군. 계절과 날씨의 변화가 많은 우리나라는 적당히 따뜻할 때, 조금 더울 때, 무지 더울 때, 일교차가 클 때, 꽤 시원할 때, 스산하게 추울 때, 엄청 추울 때 입을 옷을 각양각색으로 갖추어야 한다. 그럴 일은 없겠다. 우기와 건기가 있다지만 일 년 내내 덥고 초록이 무성한 건 어떤 신기한 느낌일까 궁금하기까지 했다. 이곳에 오기 위해 12월 비행기를 탔을 때 입고 있는 옷을 제외하고는 3개의 커다란 가방 속에 긴 팔이 단 한 벌도 없었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엄밀히 말하면 명칭이 '초등학교'로 바뀌기 직전이니까 90년대 초이다.) 학교에서 우리나라의 자랑거리에 대하여 배울 때면 88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나 한강의 기적 같은 말 외에도 어김없이 '우리나라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뚜렷합니다.'를 외쳤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당시 나는 이 세상에서 사계절이 뚜렷한 유일한 나라가 대한민국인 줄 알았다. 다른 나라야 어찌 되었든, 사십 평생 사계절이 뚜렷한(요즘은 희미해졌다지만) 삶을 기억하는 내 몸이, 인류 역사 이래 평생 여름 밖에 모르는 이 땅을 만난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봄은 오고, 그저 살다 보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지나면 피할 수 없이 겨울은 오고, 기나긴 추위에 끝을 포기할 즈음 다시 돌아오는 봄을 맞이했던 몸속에 각인된 기억이 말이다.


생각보다 적응은 쉬웠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정비되지 않은 보도 때문인지 땡볕을 걷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 오토바이나 차로 이동하고 주로 실내(인도네시아는 몰mall 문화가 발달했다.)를 이용하니 얼마나 덥든 크게 개의치 않을 일이다. 보통 낮에는 30도를 넘는데 기온에 비해 체감하는 더위는 크지 않다. 비교적 습하지 않은 날씨 때문인 것 같다. 비가 와도 시원하게 쏟아붓고 나면 그걸로 끝이다. 비 온 뒤 제법 힘 있는 바람이 불어주면 금세 땅이 마르고 산뜻한 더위가 다시 찾아온다. 한국의 여름과는 사뭇 다르다. 물론 에어컨도 한몫했다. 어디를 가나 시원하게 틀어놓는 냉방기구 덕분에 이곳이 '여름나라'라는 사실을 종종 잊기도 한다. 그래서 이 땅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거구나. 오히려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많은 현지인들이 긴팔 니트나 잠바를 입고 다니는 모습이었다. 어려서부터 여름 날씨에 익숙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려는 행동일까.


어쨌든 일 년 내내 짧은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어디든 신나게 활보한 나로서는 계절이라고는 여름 밖에 없는 이 나라가 꽤나 편하게 느껴졌다. 한결같이 푸른 위용을 자랑하는 열대의 나무들을 보면, 어쩌면 나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이 하나의 계절 속에서 살아 숨 쉬는 편안함을 간직한 것은 아닌지. 늘 우거진 무성함은 사철 옷을 갈아입을 필요도 없고, 봄인 줄 알고 피었다 갑자기 찾아오는 추위에 놀랄 일도 없을 것이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이파리를 떨어내는 수고로움도 없고, 겨울 한파를 맨 몸으로 견뎌낼 강단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느려지는 것도 하나의 계절이 주는 느긋함이다. 여기에선 지금이 몇 월인지 종종 시간을 잊어버린다. 어차피 내일도 다음 달도 내년도 그저 똑같은 여름일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절의 변화가 한없이 그립다. 매서운 동장군이 찾아오면 금세 두 손 번쩍 들어버릴 나약한 존재이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은 그 이름만 들어도 이제 가슴을 뛰게 한다. '캡틴플래닛(환경 악당들과 맞서 싸우는 주인공들을 소재로 1990년대 제작된 만화영화)'의 주제가처럼 '땅, 불, 바람, 물, 마음 다섯 가지 힘을 하나로 모아서' 지구를 지켜낼 것 같은 영웅적인 기분이 든다. 특히 계절이 변화하던 그 순간들(하나의 계절에 적응한 관성을 깨고 새로운 계절로 이동해 나갈 때)에 느끼는 짜릿한 설렘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새로운 계절로 진입할 때마다 살아온 햇수만큼의 추억을 겹겹이 소환해 내는 음악과 조명이 켜지고 무대가 밝아지는 느낌.


여전히 나는 여름나라에 살고 있지만 5월이면 꽃구경 가던 봄나들이를 생각한다. 10월에는 낙엽과 함께 떨어지던 바람을, 1월에는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콧속에서 얼어붙던 콧물조차 기억한다. 지금은 하나의 계절 속에 살지만 언제나 나에게 12월은 겨울이고, 3월은 봄이다. 7월이 여름이고 10월은 가을이다.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은 그대로를 유지하는 것보다 이겨내기 어려운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변화가 있기에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삶을 그리고 세상을 생생하게 느끼는 방법이다. 배운 지 삼십 년도 더 지난 이제야 사계절이 왜 우리의 자랑이었는지를 몸으로 마음으로 생각한다. 사계절이 주는 풍성함과 소중함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다시 맞이하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 무엇보다 격하게 만끽하고 싶다.


사진 출처 : Pixabay. J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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