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 30%, 채소 70%

by 키치니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뒤늦게 읽었을 때, 주인공 영혜가 꿈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이따금 내가 상상한 게 아니었나 하는 착각이 들었다. 정확한 문장이 기억나지 않지만 고깃덩어리들이 피를 흘리는 환상이었다고 생각한다. 태연하게 말하자면 그 또한 어느 생명의 일부였으니 고깃덩어리가 피를 흘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트에 곱게 포장된 고기에서조차 피는 흐르게 마련이니까.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그것을 다루는 과정에서는 한번도 끔찍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정신세계 미지의 영역 안에 그 괴기스러운 광경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번은 바다에서 잡아 올린 사람 키 만한 참치 수십 마리가 경매 시장에 나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일렬로 누워있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게 꼭 뻣뻣하게 굳어버린 죽은 사람들 같았다. 그리고 인간이 참 잔인하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이든 맛있게 잘 먹던 대학교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채식을 선언했을 때 그녀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제 우리의 만남에 풍성한 식사는 없겠군.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처럼 아무거나 잘 먹었던 나에게 그것은 뜻밖의 선고였다. 아니 그러므로 완전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방증이었다. 그 후 임신과 출산의 과정 속에서 결국 다시 무엇이든 맛있게 잘 먹는 친구가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이미 완전히 이해할 수 없던 관계가 소원해진 뒤였다. 십 년 넘게 지나고 나서야 진심으로 친구의 뜻을 응원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작은 비난을 했지만, 친구 역시 더 이상 채식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 또한 의미 없는 일이 되었다.


유발 하라리가 채식주의자라고 들었다. 꽤나 엄격하게 비건(Vegan) 식단을 따르는. 그래서인지 얼마 전 신간 홍보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유발 하라리의 모습이 꽤나 엄격하게 말라 보였다. 《사피엔스》에는 직접적이진 않지만 그가 왜 채식주의자가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몇몇 대목들이 나온다. 인간의 먹거리가 되기 위해 길러지는 동물들이 받는 학대와 고통에 대하여 차분하게 쓰인 문장들을 읽으며 작가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인간에 대한 거북함을 느꼈다. 그의 생각이 정말 옳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이 멀리 와 버린 기분이다. 선홍색 고깃덩어리에 자동으로 군침을 흘리는 신체 반응만 보아도 수도를 행하기에는 한없이 미진한 존재임을 느낀다. 육즙과 기름이 만나 뜨거운 불판 위에서 벌어지는 복합적인 육향과 입에 넣었을 때의 고소한 풍미는 그것을 열망하게 만든다. 넘쳐나는 고기와 그 부산물들 덕분에 너무 쉽게 본능을 채우며 편리를 받아들이고 산 우리는, 더욱이 육식을 포기하기 어렵다.


이제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나 마찬가지인 우리 엄마가 어렸을 때, 평소에 고기를 즐겨 먹을 수 있는 집은 몇몇 되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자신의 유년을 회상하며 남들은 생일날이나 먹던 소고기를, 잔칫상에서나 실컷 먹었던 돼지고기를, 식구들끼리 자주 먹었다며 자랑삼아 이야기하곤 했다. 내 유년은 전혀 유복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가정에서 고기반찬을 큰 어려움 없이 먹었다. 그러니까 고기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게 된 건 불과 50여 년 밖에 되지 않은 이야기이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아니 어쩌면 모든 생명체의 육식의 역사를 통틀어) 이 풍요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르는 우리 아이들은 이토록 흔한 고기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상차림에 어떤 형태로든 고기가 끼어있지 않으면 서운한 것은 나일뿐, 고기반찬을 보며 실망하거나 종종 고기를 피해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고 맛있는 고기를 마다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신념에 의한 회피가 아니므로.


상품으로써 가치를 지니는 고깃덩어리를 보며 그것이 한때 고귀한 생명이었음을 망각한다. 내 삶과 그들은 별개라고 동정도 감정도 섞지 않으려 한다. 모두 채식주의자가 될 수는 없는 일이라며 스스로 한 발 물러선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세상이 또렷하게 보일수록 육식에 대한 무거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손쉽게 고기를 찾는 못난 인간이 여전히 맛있게 고기를 먹고 있지만, 마음에 담게 된 한 가지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생명에 대한 존중과 감사'이다.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당연한 말이지만 나름의 작은 실천이 있다면, 적어도 우리를 위해 식탁에 차려진 생명들이 버려지지 않도록 깨끗이 비우는 것이다. 남기지 않을 만큼만 먹고 알뜰하게 먹자. 인도네시아에서는 생선과 닭의 머리까지 모두 요리에 사용한다. 그건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지만 나는 이것 역시 우리가 희생시킨 한 생명에 대한 예의라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고기를 끊을 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전체 식단에서 고기의 비율을 줄이는 것이다. 대체할 식재료가 많고 영양 상태도 좋은 요즘 같은 시대에 고기 양은 좀 줄여도 괜찮을 것 같다. 건강을 위해서도 더 좋은 일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내 마음대로 나의 식단에서 고기 30%, 채소 70%이라는 비율을 정했다. 인식의 불편함과 본능적 욕구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한 결과라고 현재로서는 말한다. 커다란 상추 위에 쌈채소를 추가하고 구운 버섯과 양파를 올린 것에 작은 고기 한 점만 넣어도 충분히 행복한 맛이 난다. 미역국을 끓일 때 고기 양을 줄여도 멸치다시물이나 액젓을 추가하면 맛이 좋아진다. 고기반찬 하나에 샐러드나 나물 등을 풍성하게 곁들이도록 신경을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고기를 적게 먹는 성장기 아이에게 나는 고기를 권하는 엄마이다. 큰딸은 자신이 어른이 되면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아직 무언가를 알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단지 본인은 고기 맛을 알 수 없다는 이유이다.) 나도 영혜 아버지처럼 말라가는 딸을 보며 입 속에 억지로 고기를 욱여넣는 부모가 될까? 이 장면을 상상하니 육식에 대한 나의 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육식과 채식에 대한 철학 없는 혼돈이 미래에는 조금 해소될 수 있을까? 그때는 동물 복지와 인간의 욕구 사이에 어떤 타협점을 찾게 될까?


호모 사피엔스는 뇌의 용량을 늘리기 위해 다른 기관에서의 에너지 소비를 줄이려고 채식보다 소화에 효율적인 육식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찬란한 멸종》 이정모 지음. 참고) 하지만 이제는 반대로 '인류세(Anthropocene)'라고도 불리는 지구에서 인간 혼자 살아가지 않기 위해 고기의 소비를 줄여야 할지 모른다. 세계적으로는 건강, 환경, 윤리적 이유로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인식의 변화 때문인지 요즘은 일반 음식점에서도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뉴가 심심찮게 눈에 들어온다. 특별히 고기가 당기는 날이 아니라면 맛있는 채식을 즐기자. 고기에 대한 금기가 아니라 각종 채소의 매력을 좀 더 탐색해 보는 것이다. 솔직히 채식주의를 결정하지는 못하겠다. 험난한 그 길을 대신하여 의식적으로 고기를 줄여본다. 고기 30%, 채소 70%.



"심지어 동식물까지 기계화되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인간 중심 종교에 의해 신성한 지위로 격상될 무렵, 농장 동물들은 더 이상 고통과 비참함을 느낄 수 있는 생명체로 간주되지 않았고 기계 취급을 받게 되었다. 오늘날 동물은 공장 비슷한 시설에서 대량 생산되며, 몸체의 형태도 산업 수요에 맞게 형성된다. 거대한 생산라인의 톱니로서 전 생애를 보내며, 그 수명과 삶의 질은 해당 기업의 이익과 손해에 따라 결정된다. (중략)

달걀과 우유와 고기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짬을 내어 자기가 살이나 그 산물을 먹고 있는 닭과 암소, 돼지를 생각하는 일이 드물다. 실제로 생각해 본 사람들은 종종 그런 동물은 실제로 기계와 다를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얄궂게도 우리의 우유 기계나 달걀 기계를 빚어내는 바로 그 과학 분야는 최근 포유류와 조류가 복잡한 감각과 감정적 기질을 지녔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을 증명해 냈다. 육체적 통증을 느끼는 것은 물론, 정서적 고통도 느낀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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