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00원짜리 공부

by 키치니

작년에 모임을 같이 하는 분이 '입트영(EBS오디오어학당의 '입이 트이는 영어' 프로그램으로 매일 아침 20분씩 방송한다.)'을 함께 공부해 보자고 제안했다. 스터디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 각자 일주일에 세 번 방송을 듣고 네이버밴드에 인증을 올리기만 하면 되었다. 처음엔 삶에 뭘 더 얹는 것이 부담되어 망설였다. 하지만 영어라는 큰 산을 넘어보기로 마음을 먹은 터였고, 방송을 한 회차 들어보니 생각보다 할 만한 것 같아 동의하였다. EBS 방송이 모두 무료라는 생각은 얄팍했다. 필요한 프로그램을 들으려면 한 달에 4,900원이라는 구독료를 내야 한다. 평소 5천 원 정도의 소비는 큰돈이 아니었음에도 매달 정기구독료를 내자니 본전 생각이 나기도 했다.


교재를 구할 수 없어서 PDF파일을 제공하는 몇 개월 지난 방송을 듣고 있다. 매번 종이로 인쇄해서 공부하는데 어느덧 한 권의 책으로 제본 떠도 될 만큼 두께감 있게 쌓였다. 혼자 마음먹은 일이라면 작심삼일을 면치 못했을 텐데, 누군가 함께 인증한다는 사실 덕분에 꾸준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인증을 안 한다고 야단맞을 일도 아니고 벌금내기 같은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든다. 더욱이 성실을 미덕으로 여기는 나의 자존심이 게으름을 허락할리 없다. 하지만 무엇이든 길어지면 뒷심이 빠지기 마련일까. 처음에는 열정적으로 한 주의 목표치를 채우던 것이 마감까지 미루다 겨우 실적을 맞추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의욕저하. 입트영 인증이 한 주의 부담이 된 것이다.


몇 달 지나 함께 하던 분도 슬슬 인증하는 횟수가 줄어들더니 여러 이유로 인증을 못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마침 한국에 다녀올 일이 생기면서 한 달 이상을 쉬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안 하다 보니 안 하고 싶다."

마치 누군가로부터 무한한 자유를 얻은 것처럼 그렇게 기쁘고 편할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다 합쳐서 일주일에 겨우 2시간을 할애하는 것인데,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만 시간의 법칙'과 비교해 보니 참 보잘것없는 시간이다. 어쨌든 해방감을 맛보니 다시 돌아가기가 쉽지 않다. 더욱이 지인마저 나와 비슷하게 잠시 중단하게 되었다. 억지로라도 나를 끌어주고 밀어줄 동력이 떨어졌다.


본전을 생각했던 구독료는 어느새 까맣게 잊어버렸다. 매달 자동 결제 문자가 올 때마다 '아차!' 하는 마음이 들지만 잠시뿐이다. 처음에는 얼마나 호기로웠던가. 기왕 돈 내고 듣는 김에 다른 프로그램도 이것저것 청취하겠다던 투지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오디오어학당을 한 번도 접속하지 않고 다달이 4,900원은 빠져나갔다. 이럴 거면 구독을 취소하는 게 수순 아닌가. 구독료에 대한 죄책감도 희미해질 즈음, 그때 어디선가 내면의 다른 자아가 오기를 품고 올라왔다. 하기 싫으니까 차라리 더 빡세게 해 보는 건 어떨까. 일주일에 세 번이 아니라 네 번, 다섯 번을 해보자. 그냥 '닥치고' 매일의 루틴을 만들어버리자.


구독료를 내지 않았다면 '안 하고 싶어 안 하게 된' 그 시점부터 스스로 흐지부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구독을 취소하는 것이 일종의 패배를 선언하는 기분이 들어 미루고 버티다 결국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 비록 혼자 하는 인증이지만 기존에 부담을 느꼈던 방식을 버리고 형식보다 내용에 집중하는 형태로 공부 방법을 바꾸어 가고 있다. (지문을 소리 내어 반복적으로 읽기, 하루에 한 두 문장만 챙겨가기로 방법을 바꾸고 나서 훨씬 마음의 부담도 덜 하고 현재로서는 지속 가능한 것 같다.) 그리고 '주중에는 매일 한다'로 목표를 바꾸고 나니 다음날로 미루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공부 습관을 오히려 더 잘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동그라미처럼 멈추지 않고 굴러가야 하는 존재인가 보다.)

4,900원짜리 공부는 활용하기에 따라 그 가치가 천차만별이다. 오디오어학당 안에는 영어뿐만 아니라 다양한 언어를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많다.(홍보 대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지만 나 역시 인도네시아어 수업을 유용하게 들었다.) 영어만 해도 듣기, 말하기, 문법, 표현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고 심지어 미국영어, 영국영어를 따로 공부할 수도 있다. 해외에 나가 어학연수를 하지 않고도 다른 언어를 잘할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큰 소득이 있을까. 언어 외에도 요즘 세상은 하고 싶다면 공부할 수 있는 것들이 널려있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접근 가능하다. 그저 숟가락으로 떠먹기만 하면 될 것 같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매달의 작은 구독료가 나를 붙잡아주었다. 이 공부를 꾸준히 해나가서 몇 배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 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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