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는 기후가 맞지 않아 귤을 재배하지 않으므로 주로 겨울에는 중국산, 여름에는 호주산 귤이 들어오는데 씨가 있고 밍밍한 것들이 많아서 우리는 씨도 없이 새콤달콤했던 한국 귤의 품종에 여러 번 감탄한 적이 있다. 특히 제주도 할머니 할아버지댁 귤은 이곳에서 가장 그리운 먹거리 중 하나이다. 그나마 호주산은 seedless 상품이 많아 호주의 겨울이 끝나가는 8~10월에 즐겨 먹는다.
그런데 얼마 전 한국 나이로 4학년인 우리 둘째가 휴지에 꼬깃꼬깃 무언가를 싸서 비밀리에 창가에 두더니 매일 들여다보며 스포이트로 물을 몇 방울씩 주는 모습이 관찰되었다. 며칠을 그대로 두고 보다 참지 못하고 물으니 싹이 자라고 있다고 대답했다. 상황인즉슨 귤을 먹다 우연히 씨를 씹었는데 씨 안에서 아주 작은 초록색 싹이 보였다고 한다. 이 소중한 생명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치 응급실에 들어온 환자를 대하듯 씨앗을 휴지로 보호하고 햇빛을 쬐어주며 물이 마르지 않게 해 주었던 모양이다.
휴지를 하도 열었다 오므렸다 하여 먼지털이 날리는 씨앗의 모습을 보고 계속 자라기는 힘들거라 속으로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결국 싹을 틔웠다. 호주 농부가 씨앗 없는 상품을 만들고 싶었던 마음과 다르게 귤은 다음 세대를 위한 씨를 갖고 태어났고, 어떤 아이의 치아 사이에서 부서져버릴 위기를 맞았지만 이를 용케도 극복하고 애정 어린 도움으로 마침내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했다. 풍파를 이겨낸 씨앗도, 작은 생명을 소중히 여긴 딸도 대견하고 기특하여 화분을 만들어주자고 제안하였다.
화분에는 모두 3개의 귤씨를 심었다. 이미 발아한 씨앗 하나와 아직 살아있다고 볼 수 없는 입에서 함께 오물거리던 두 개의 씨앗이었다. 둘째는 발아한 씨앗이 주인공인 것처럼 한가운데 심고, 나머지 두 개는 엑스트라라도 된 듯 가장자리에 나란히 심었는데, 나중에 나머지 씨앗에서도 여린 초록색 싹이 나왔다. 그 사이, 주인공을 맡았던 새싹은 안타깝게도 시름거리다 누렇게 색이 변하고 잘 자라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뽑아버렸다. 그 대신 엑스트라 출신이던 두 새싹이 너무나 예쁘게 자라고 있다.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새 생명이 뿜는 에너지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사실 우리 둘째는 씨앗을 살린 여러 추억이 있다. 여덟 살 즈음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화분 흙에서 못 보던 싹이 올라오길래 "이게 뭐지?" 했더니, 혼자만 아는 비밀을 알려주듯 방울토마토 씨앗을 뱉어놓았다고 했다. 놀랍게도 쑥쑥 자라 열매를 맺어 서너 알 밖에 되지 않는 토마토를 소중히 따 먹기까지 했다. 방울토마토가 자라는 것을 보고 자신감을 얻었는지 다음에는 파프리카를 먹다 몰래 씨앗을 심어놓고는 싹이 나오자 마치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내듯이 맞춰보라고 했던 기억도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남편도 한국에서 아보카도를 먹던 날 커다랗고 탐스러운 씨앗을 버릴 수 없다며 '아보카도 싹 틔우는 방법'을 검색하더니 작은 소주잔 반쯤 물에 담가 소중히 돌본 경험이 있다. 보통 3개월이면 싹이 나온다던데 시간이 지나도 처음 물에 담글 때와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이던, 그저 침묵하는 둥근 물체를 나는 믿지 않았다. 저 안에 무슨 새로움이 들어있기는 할까. 멕시코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미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소진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의 모든 것은 아보카도 씨앗이 살았던 엄마의 땅과 다르다. 내가 내린 결론이 그래서 이제 그만 치우자고 말했다.
그러고도 차마 버리지 못하여 끊임없이 물을 갈아주더니 어느 날 겉껍질이 갈라지고 아래를 지향하는 뿌리가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했다. 6개월도 더 지난 시간이었다. 마법의 주문에 걸려 잠자던 정령이 깨어나듯 그다음은 연두색 새싹이 위를 향해 진격했다. 생명의 신비에 감탄한 순간이었다. 모든 조건이 스스로에게 맞아떨어질 때까지, 적합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기회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 씨앗이 드디어 마음을 연 것이다. 남편은 신이 나서 화분에 조심스럽게 옮겨 심고 아이들은 '박보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이들 성이 '박'씨이다.) 여기 오기 전까지 줄기도 제법 굵어지고 이파리도 무성해지도록 잘 키우다가 식물은 데려올 수가 없어, 화분을 좋아하는 지인에게 주었다.
남편은 그런 사람이다. 산을 걷다가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하여 한 뼘 남짓한 단풍나무가 뿌리째 뽑힌 것을 보고는 집으로 가져가 심자고 하였다. 내 머릿속은 커다란 단풍나무가 화분을 뚫고 나와 우리 집을 가득 채우는 상상으로 잠시 복잡해졌다. 우리는 결국 산의 좋은 자리에 그것을 심어주고 내려왔다. 아기단풍나무도 바라는 바 일 것이다.
씨앗만 보면, 여린 새싹만 보면 눈이 반짝거리는 모습이 아빠랑 딸이 꼭 닮았다. 지난봄 시드니 여행에서 맛있는 자두를 먹고는 공원에 그 씨를 심었다. 법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엄마의 주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먼 훗날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자두나무가 아이들만큼 훌쩍 자라 있을 것이라는 낭만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글을 쓰며 찾아보니 실제로 문제가 될 수 있는 행동이므로 다음부터는 조심하자.) 한국에 돌아가면 주말 농장이라도 알아보아야 할 것 같다. 그 맑은 마음이 예쁘게 자라라.
하나의 씨앗은 하나의 우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