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간은 더 이상 의식이 작동하지 않고 모든 것이 확인되고 훈련을 마쳐 이제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자동으로 그런 일들을 감당하고 다루는 때를 말한다. 따라서 새로운 자극이나 경험이 아닌 이상 우리는 그것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다. 예를 들어, 매일 같은 시간에 하는 아파트 산책에서 나는 내가 어떻게 그 길을 걸어 다시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어느 지점에서 사람과 마주쳤고 인사를 나눴으며 어떤 나뭇잎을 피해서 걸었는지. 어디에 꽃이 떨어져 있었고 하늘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걸음을 오른발부터 내디뎠는지 왼발부터 내디뎠는지. 팔을 힘차게 흔들었는지 뒷짐을 졌는지. 어쩌면 그러한 무의식적인 작용 덕분에 우리는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모든 순간순간 마다 의식이 깨어 있었다면 이미 머리가 터져버리거나 정신이 아득해졌을지도.
자카르타에서 살고 있는 우리 집은 회사의 지원으로 현지에서 좋은 아파트에 속하는데 처음 내 눈에 정말 불편했던 장면이 있다. 아파트 산책로를 청소해 주시는 분들이 바닥에 붙은 얼룩을 제거하기 위해 구부려 앉아 거친 솔로 바닥을 문지르는 모습이었다. 바람이 불면 하염없이 떨어지는 나뭇잎을 빗자루로 쓸고 또 쓸어내는 일도 쉽지 않지만(이건 그나마 허리를 펴고 서서할 수 있는 일이다.) 새가 날아가다 실례를 한 건지, 밟힌 벌레가 남긴 자국인지, 아니면 도대체 왜 자꾸 생기는 건지 모를 얼룩들을 매일매일 지워나가는 일은 끝도 없이 야속하게 보였다. 음식을 먹고 물건을 사고 시설을 이용할 때 보이지 않는 또는 보이는 곳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 장면만큼은 왠지 내 마음을 후벼 팠다.
더욱이 멋진 조깅화를 신고 그 옆을 가볍게 뛰어가는 입주민의 모습은 엄청난 대비로 나에게 다가왔다. 누구는 아파트를 깨끗이 하려고 일을 하고 있는데 누구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 운동을 하다니. (물론 조깅을 하는 사람이라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의 종류가 다를 뿐이며, 우리가 각자 자신의 일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길은 하나 같은 길인데도 누군가에게는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산책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고단한 일터가 될 뿐이라니. 누군가에게는 떨어진 꽃송이가 그저 아름답게 보이는데, 누군가에게는 치워야 할 과제가 늘어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때로는 그런 상상을 해 보았다. '제가 좀 도와줄까요. 여기부터 저기까지는 제가 쓸어볼게요.' 하지만 그럴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는 바보 같은 생각이다.
유난히 그와 비슷한 감정을 일으키는 일이 있는데 이곳 유모들의 모습이었다. 내니는 아이를 졸졸 따라다니며 돌보고 밥을 먹이는데(물론 나도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그랬다) 아이의 엄마아빠는 편하게 밥을 먹고 친구들과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눈다.(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다.) 심지어 라마단(무슬림의 금식 기간)에도 식당에 함께 와 모두가 식사를 하는 그 장면에서 히잡을 쓴 그녀는 혼자 아이를 챙기고 있다. 이것이 그들의 룰이고 문화일 수 있지만 이방인에게 그다지 유쾌한 모습은 아니었다. 물론 이런 단편적인 모습에서 어떤 편견을 갖거나 그것에 대해 평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내 마음이 매우 어색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산책을 하다 그 모든 것에 너무 익숙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일 걷는 그 길에서 별다른 특이점을 느끼지 못하고, 현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다가 겨우 그것을 발견했다. 이제 더 이상 나에게도 이런 장면은 의식에 있지 않았다. 아득히 먼 무의식 속으로 안착해서 마치 처음부터 당연했다는 듯 행동하고 있는 스스로를 보았고 이미 적응은 끝났고 낯선 것들은 자연스러워졌다. 더 이상 산책을 하며 청소하시는 분들 사이를 지나가는 것을 불편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편안하고 익숙해졌는데 왠지 뒤가 서늘하다.
누군가는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그 문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