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많이 온다. 잠시 그치는가 싶더니 다시 주룩주룩 잘도 내린다. 하늘은 어둡고 빗소리는 시끄럽지만 내가 있는 공간은 고요하다. 한국은 한파 절정이라는데 이곳은 우기가 계속되고 있다. 사치스러운 이야기 같지만 비는 여기 더운 날을 시원하고 말끔하게 닦아준다. 인도네시아 도로 상황이 좋지 않아 이런 날은 어김없이 여기저기 '반지르'(인니어로 침수)가 생기고 교통체증이 심해져 이동 시간이 평소의 2~3배로 늘어난다. 이럴 때 집에 가만히 있을 수 있다는 건 감사할 일이다. 비가 그치면 어슬렁어슬렁 산책이나 나가볼까.
오늘은 느슨한 글을 쓰고 싶다. 글도 산책처럼 그저 어슬렁 거릴 수 있다면. 문단도 맥락도 고려하지 않고 그냥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글을 쓰면 어떤 글이 나오려나.
나의 인생 드라마는 '나의 해방일지'이다. 인도네시아에 와서 초창기 할 일은 없고 만날 사람도 없고 무얼 해야 할지 모를 때 처음 이 드라마를 보고는 한참을 헤어 나오지 못했다. 3번쯤 봤을까. 중간중간 짧게 편집된 영상까지 합치면 이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말할 자격 정도는 있는 것 같다. 염미정이 살았던 경기도 외곽의 산포시, 내가 타고 다녔던 전철역과 비슷한 당미역, 늘 해방되고 싶어 하는 그녀, 염미정답게 꾸민 외모, 사랑이 아닌 추앙이라니. 그런 것들이 마음에 들었다. 기회가 되면 대본집을 구입하고 싶을 정도로 남은 대사들도 많다.
"잘 돼서 날아갈 것 같으면 기쁘게 날려 보내 줄 거고,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팔려하지 않을 거고. 인간 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라고."
그중 종종 떠오르는 대사인데 드라마에서는 구 씨를 향한 다짐이었지만 나에겐 조금 다른 의미로 와닿았다. 엊그제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딸과 문제가 있었다. 울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쓰겠다는데, 다 쓴 글을 보고 아이의 마음 상태가 생각보다 어두워서 적잖이 놀랐다. 나는 그동안 좋은 엄마 코스프레만 한 걸까. 내 노력과 반대의 어느 방향으로 우리가 가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나를 돌아보는 중에는 어떤 중심이 필요하다. 변하지 않는 진리처럼 아주 무겁고 단단한 것.
난 가둔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본인은 갇힌 것 같아 답답하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 염미정 말이 맞다.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가렴. 아니 한없이 쭈글거린다고 해도 괜찮다. 그냥 나는 너를 응원할 자격만 있다. 그리고 너는 그럴 권리를 갖고 태어난 존재이니까.
너무 고요한 게 싫증 나서 음악을 틀어본다. 아이유 노래는 지금 분위기와 대충 잘 맞는다. 초등학교 1학년 국어활동 교과서 첫 부분에 몇 가지 글자를 써보는 게 나온다. 내 이름, 우리 학교 이름, 아버지와 어머니 이름. 이번 개정과정에서 빠졌을 거라 믿지만 아무튼 바로 직전까지 썼던 교과서도 이랬다. 혹시라도 아버지나 어머니 이름이 쓰기 싫은 아이는 어쩌라고. 그것도 제도권 교육의 첫 발을 디딘 설렘도 벗어나지 않았을 무렵 벌써 세상의 냉혹함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그 칸을 나는 항상 아이유 이름을 적게 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라는 편파성이 컸지만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처럼 아이들이 처음 쓰기 쉬운 글자로만 되어 있다는 게 핑계였다.
딸내미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어간다. 학교가 멀어서 스쿨버스로 거의 한 시간이나 걸린다. 비가 오는 날은 안전한 귀가가 아무래도 좀 더 신경이 쓰인다. 그 사이 비가 그친 것 같은데 막히지 않고 잘 오려나. 분명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며 큰딸은 배고파를 외칠 것이다. 냉장고에 이틀 전에 사 둔 식빵이 있는데 프렌치토스트라도 만들어야겠다. 식빵을 조금씩 사다 먹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한 봉지에 열 장 들은 묶음은 우리에겐 무리이다. 첫날은 보들보들해서 딸기잼을 발라먹으면 꿀맛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인기도 시들고 맛도 시든다. 프렌치토스트는 말라가는 식빵에 인공호흡하는 과정이나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을 기쁘게 맞이하며 내가 잡은 무게중심을 잃지 말자 다짐한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사랑이 담긴 토스트 한쪽이다. 나머지는. 본인들 스스로 해방되어 자유롭게 날아가야 하는 것뿐이다.
글 산책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