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 줄은 서지 않는다. 아니, 그 어디에도 '줄'이라는 것은 질색이다. 그런 지루한 기다림을 좋아할 리 없다.
'두쫀쿠'가 자카르타에 상륙했다. 사람들은 참 재빠르고 나는 마지못해 따라가 볼까 말까 하는 편이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카페에 두쫀쿠가 유명하다는 소문이 한참 돌고 난 후에 드디어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고자 요즘 잘 나간다는 그것을 사러 갔다. 둘째는 한국 친구들 사이에서 두쫀쿠를 먹어본 이야기가 자랑처럼 회자되었는지 두쫀쿠를 사 오겠다는 말에 내심 기대를 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문제였다. 아이들이 학교 간 평일 오전 가장 한가한 시간에 아무 생각 없이 출발했다가 가게 앞에 늘어지게 선 줄을 보고는 놀라 뒷걸음질 쳐 돌아왔다. 소소한 재미라고는 1도 모르는 나는 그게 뭐라고 줄까지 서야하나 싶었다. 기다림은 너무 싫으니까. 그날 학교에서 돌아온 둘째는 결국 대성통곡을 했다. 친구들은 다 먹어보았는데 자기만 못 먹었다는 속상함과 함께 기대를 저 버린 실망감이 이만저만 아니었나 보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으랴. 결국 토요일에 함께 오픈런을 하기로 약속하고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주말엔 평일보다 '훠얼씬' 줄이 길 텐데. 심란한 마음으로 맞이한 그날 아침, 다행히 한 시간까지는 걸리지 않아 카페에 입성했고 두쫀쿠를 전유물처럼 챙겨 나왔다. 1인당 4개로 제한된 귀한 몸값은 그 가치를 더 돋보이게 했다. 한국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고객들 대부분이 현지인들이라는 사실에서 SNS의 파급력을 느낀다. 두바이라는 이름의 한국 디저트(?)를 인도네시아에서 접하는 기분이란. 이것을 K푸드라는 맥락으로 해석해야 하는 건가. 잡다한 생각은 접어두고, 두쫀쿠 맛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쌉싸름한 코코아 가루를 지나 살짝 탄력 있는 마시멜로 안으로 들어가면 고소한 피스타치오 스프레드에 바삭하게 씹히는 카다이프의 식감이 어우러져 정말 완벽한 조화다. 또 사러 줄을 설 판이로구나.
그날은 기다림의 할당량을 모두 채웠다는 홀가분한 마음이 무색하게 또 다른 무료한 기다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휴대폰 배터리가 없었다. 신이 있다면, 나를 시험에 들게 하여 깨달음을 주시기로 작정한 날은 아닐까.
혹시 손에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채 마냥 기다리는 시간을 보내 본 적이 있는가. 이야기 나눌 상대도 없고 읽을 책이나 끄적거릴 볼펜도 없는. 스마트폰도 태블릿도 티브이도 없는 순수한 기다림 말이다. 나는 이제 거의 그런 시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막막하기만 한 시간이 새롭고 신기했고 그렇지만 견디기 힘들 것 같아 걱정되었다.
기다림이 직업인 사람들이 있다. 전에《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패트릭 브링리 저)》를 읽으며 하루종일 무언가를 지키며 서 있어야 하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어야 하는 일. 시간을 버티는 일. 내가 스쳐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 경찰서 앞의 경찰관, 초소를 지키는 군인, 아파트 정문 앞의 경비원, 박물관의 안내원, 곳곳에 배치된 보안요원들. 나를 그곳에 떨어뜨려 놓는다면 단 하루를 버틸 수 있을까. 성질이 급해서 잡히자마자 죽는 고등어처럼(과학적으로는 알려진 사실과 다른 점이 있지만), 지루하고 끝도 없는 느긋함을 참지 못하고 발작을 일으키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위해 자리를 지키고 시간을 보내는 이들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온 마음을 다해 그들의 시간을 인내로 바꾼 것에 감사해야 한다.
같은 날 오후 작은 공원에 동물을 보러 갔는데, 중간에 휴식 시간이 끼는 바람에 두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한 시간은 딸들과 함께 있어 그럭저럭 보냈는데 다른 한 시간은 아이들을 기다리며 오롯이 혼자 보내야 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잘 기다릴 수 있을까.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게 없다. 이럴 때 뇌가 있어서 생각이라도 할 수 있으니 다행이구나. 아니, 뇌가 없었으면 기다림을 괴로워할 일도 없지 않은가. 그러면 내가 돌멩이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잘도 흘러간다. 나는 다리가 아프고 돌아다닐 마음이 없으므로 한 자리에 앉아 있다. 그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조그만 인조잔디와 우리 애들이 들어간 작은 건물뿐이다. 그래도 주변에 사람들이 돌아다닌다. 나는 그들을 관찰하는 것 밖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눈을 감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마을 어귀 정자나무 아래 앉아있는 어르신이 된 기분이다. 그저 멍하니 바라본다. 따라다니며 아이 밥을 먹이는 엄마, 유모를 둘이나 데리고 온 부부, 사슴의 움직임에 놀라 소리치는 아이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물을 마시는 아저씨, 거북이를 들고 이동하는 아줌마. 아까 우리가 처음 들어왔을 때 했던 것과 비슷한 행동을 해대는 사람들. 우린 다 다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하구나.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사진을 찍는데 열중한 언니들. 마크 저커버그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준 걸까 불행을 준 걸까. 그녀들은 내가 있는 여기 보다 온라인 속 어딘가를 더 즐기는 것 같다. 인도네시아 친구 답지 않게 키가 훤칠한 학생이 등장한다. 옆에 안경 끼고 히잡을 두른 여성은 가족일까 여자친구일까. 지금 보니 부모님이 함께 오셨구나. 가족사진을 찍는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들의 에너지가 나에게도 느껴진다.
생각보다 시간은 빨리 흘렀다. 휴대폰도 없고 시계도 따로 갖고 있지 않으므로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는 사이 아이들이 나왔다. 드디어 기다림에서 해방이다. 누가 나를 가둔 것도 아닌데 오랫동안 갇혀있다 풀려난 것 같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로구나. 기다림이 직업인 사람들도 집에 갈 때는 이런 마음일까. 생각해 보니 난 늘 시간을 쪼개며 살았다. 마치 시간 한 줌이라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나를 돌려댔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그 시간도 결국 무언가로 채워진다. 나는 무엇을 채웠을까. 늘 급하고 재촉하던 스스로에게서 벗어나 아주 천천히 생각할 시간을 가졌고, 주위를 둘러보고 다른 이들로부터 무언가를 받았다. 그들이 나에게 주고 싶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것이 나에게도 왔다. 패트릭 브링리가 말했던 '채울 수도, 죽일 수도 없는 시간'은 맞지 않다. 그 시간도 결국 가득 차 있고 생생하게 살아있다.
시간이 흘러가도록 두는 것은 정말 곤욕이지만 나도 아이들을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기다림이라고 부른다.
식사 시간이 끝나고 저녁 교대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게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몸도 마음도 지쳤다고 느낀다. 남은 시간은 꿈결처럼 신전 앞에 서서 시선을 여기에 두었다가 저기에 두었다가 하면서 그저 흘러가게 두리라 생각한다. 명랑한 관람객 하나가 내게 지루한지 묻는다. 내가 특별히 지루해 보여서 물었다기보다 종종 받는 질문이다. 딱히 그렇지 않다고 답하자 그녀는 "좋네요!"라고 말하고는 가버린다. 나는 지루해하는 법을 거의 잊어버렸다고 말할 기회를 놓친다. 스톡홀름 증후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거북이처럼 흐르는 파수꾼의 시간에 굴복한 것 같다. 나는 이 시간을 소비할 수 없다. 그것을 채울 수도, 죽일 수도, 더 작은 조각으로 쪼갤 수도 없다. 이상하게 한두 시간 동안이라면 고통스러울 일도 아주 다량으로 겪다 보면 견디기가 수월해진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일이 언제 끝날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는 사치스러운 초연함으로 시간이 한가히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구식의, 어쩌면 귀족적이기까지 한 삶에 적응해 버렸다.
- 패트릭 브링리《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중에서
사진 출처: Pixabay. Vlad Vasnets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