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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만추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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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단 Jun 08. 2020

가을 겨울 사이 서울 #2

헬커피로스터스, 비스테까




#1

센트럴시티와 이태원 사이는 버스로도 15~20분이면 충분했다. 택시라면 10분이면 넉넉하다는 결론이었다. 정거장에 마침 서있던 택시 한 대를 붙들고는 부리나케 4명이 올라탄 뒤, 이태원 헬커피로스터스로 이동해달라고 말했다. 사장님은 어딘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서울 폴리텍 앞이라고 얘기한들 소용없었다. 위치야 알지만 정확히 어디 내려주면 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하여, 사장님은 카카오 네비를 켰다. 

평소 수많은 남장네의 환심 속에 사는 k는 특유의 코맹맹이 소리로 최첨단 인공지능 내비게이션 카카오 네비를 유혹(?)했지만, ai는 무정히 도 그녀를 손절했다. 연신 헬커피로스터스를 외쳐도 네비는 도저히 알아듣지 못했다. k는 상처(잔기스) 받았다는 투로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하는 수 없이 k는 핸드폰 네비를 켜들었고, 택시기사님은 네비 안내양의 목소리를 따라 우릴 헬커피 인근의 3거리에 내려놓았다. 사장님은 생각했을 것이다. 

‘촌놈들이 서울 구경 온 게로 군.’ 

우린 누가 봐도 촌놈들이었다. 아침 11시부터 이태원을 가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촌놈이라 깃발 들고 다니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2

헬커피로스터스는 이태원에서 프릳츠커피와 함께 이태원에서 유명한 로스팅 커피 가게였다. 지금이야 여기저기 분점도 있는 모양이던데 ‘헬’이라는 다소 의외의 단어를 사용한 가게 이름도 그렇고 그 명성도 명성이거니와 가게 특유의 오래되고 빈티지한 내부도 좋았다. 물론 커피맛이야 내가 알리가 없는 것이지만, 나는 늘 분위기가 음식 맛의 절반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헬커피는 청주에서 느껴보기 힘든 오랜 세월과 독특한 주인장의 인테리어 감각이 묻어나는 곳이었다. 가게는 온통 지옥에라도 온 것처럼 새카맣고, 어두침침했고, 홀을 거대한 탁자와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높은 의자로 둘러싸여 있었고, 구석에는 거대한 스피커가 있었다. 사람 허리춤까지 오는 스피커에서는 낯선 이국의 연주라 흐르고 있었다. 5월의 얘기다 그날 헬커피의 영업시간은 11시가 아니라 12시부터였고, 가게 안은 청소 중이었다. 알바는 꽤나 냉정했다. 손님을 받을 수 없단다. 난 ‘매정한 서울 놈들!’을 외치며 가게를 나왔고, 하는 수 없이 비스테까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 시각이 11:30 정도였으니 걸어가면 충분한 거리였다. 주주사의 무릎이 걱정되긴 했지만, 더러는 힘들어도 자신의 두 발로 그 공간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내가 평소 좋아하는 사진작가 임재천은 말했다. “걷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 그 모든 것들은 스쳐 지나갈 뿐이라고.”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다만, 그가 그렇게 자동차 운전면허도 없이 부지런히 걸어만 다니다 무릎 연골이 나갔다는 건 좀 그렇지만 말이다. 아무튼 j의 무릎의 연골과 십자인대는 튼튼할 것이라(그간 거의 2년에 가까이 관찰한 바) 사료되었고, 딱히 j가 거절하지도 않거니와 다들 시간도 비는데 뭐 까이꺼 걷지 뭐 분위기인지라 그냥 걸어보기로 했다.




#3

이태원은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지난밤, 광란의 시간 때문인지 거리는 한산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한 상징처럼 연일 방송에 나오는지라 진짜 그런가 보다 했지만, 이내 이태원 중심가에 다다르자 그것은 다 맞는 얘긴 아니었다. 제법 많은 인파로 거리는 북적거렸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이태원은 제각각 한 개성 하는 우리 넷이 모인 사무실과 큰 틀에선 다를 것이 없었다. 더러는 같이 잘 지내는 것도 모자라 온갖 일들로 킬킬 거리는 상황들이 신기할 따름이지만. 




#4

이태원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틀어 녹사평역 방향으로 걸었다. 스타워즈에 나오는 스팍과 똑같은 머리를 한 아주머니가 우릴 노려보는 통에 섬뜩 놀래기도 하고, 예전에 y가 이 길을 걷다 거대한 흑형들을 마주하고는 눈 깔았던 얘기도 하며 킬킬거리기도 하고, 이태원초 앞에서는 이곳을 운영하는 체육시설에 행정직과 시설관리직이 몇 명 있을 것 같냐는 직업병적인 토론마저 거쳤다. 이내 길은 경리단길의 언덕바지에 이르렀고, 역시나 쭈주사가 무릎 관절의 통증과 체력적 부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했던 시간에 딱 맞춰, 가파른 언덕길의 비스테까에 당도했다.

이래저래 경리단을 수없이 지나다녔지만, 이곳이 그곳인 줄은 몰랐다. 이곳을 선택한 건 순전히 수요미식회 때문이었다. 수많은 이태원 양식집 중에서 수요미식회은 이것을 추천했고, 심지어 최현석의 스승이 운영하는, 아주 오래된 노포였다. 노포라고는 해도 그건 우리나라 요식업계의 평균수명이 1~2년 정도인 것을 감안한 표현이다. 힙하다거나 개성 넘치진 않지만, 그래도 준수하게 얌전한 외관의, 위압적인 느낌으로 먼 곳에서 온 촌놈(?)들을 불편하게끔 만드는 그런 곳은 아니었다. 나쁘지 않았다. 일단 합격.


직원의 안내를 받고는 홀 한 중앙에 앉았다. 일주일 전에 예약했건만, 남산 뷰의 창가 자리는 예약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인기 많은 식당에 4명이 앉아먹을 자리가 있는 게 어디냐며 감사할 일이었다. 예상과 달리 가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우리뿐이었다. 토요일 점심, 오후 12시였음에도 말이다. 우린 마치 h가 떠난 사무실처럼, 전세라도 낸 듯이 마냥 떠들어 댔다. 

그날 단연 화제는 k의 소개팅이었다. 팰리쉐이드를 끈다는 어느 시청인가 군청인가 있다는 남정네와의 소개팅이었다. 상대방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술을 잔뜩 마셨다는 k는 연신 해장이 필요하다 하였지만, 우리의 관심사는 오로지 k의 덫에 걸린, 그러나 한편으로 자신이 잘나 k의 관심을 산 것이라 확신하고 있을, 그 불쌍한 남정네의 앞날이었다. 차마 보다 못한 c는 해맑은 표정으로 외쳤다. 

(혹은 또 뼈 때리기를 작렬했다.)


“도망가! 도망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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