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의 결혼식과 지난 이야기들
언젠가였다. 녀석이 불쑥 찾아왔다. 여자 친구가 생겼단다. 녀석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다며 그분(?)의 사진을 보여줬다. 머리 긁적이는 녀석의 표정이란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것이었다. SNS 프로필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꽃을 찾은 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평소 짧은 몇 마디로 주변 사람들을 빵빵 터트리는, 악마의 재능을 가진 녀석이었으니. 이번 주엔 어디 갈 거냐 물었더니, 전주의 아이맥스 영화관에 간단다. 녀석 답다. 나나 녀석이나 영화관이라면 껌뻑 죽었다.
2008년이었다. 늦은 저녁. 녀석과 같이 '다크 나이트'를 보러 갔다. 영화가 끝나고, 한스 짐머의 거한 음악이 흐르고, 영화 타이틀이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녀석과 나는 넋이 나가 있었다. 상영관을 빠져나오니 야심한 시각. 쇼핑몰 문은 닫혀있었다. 밖으로 나가는 방법은 엘리베이터와 비상계단뿐. 엘리베이터 앞으로 늘어선 줄을 보곤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녀석과 나는 잔뜩 흥분해 있었다. 계단을 사정없이 뛰어내려 갔다. 고요하던 비상 통로가 우당탕거렸다.
후에 녀석의 프로필 사진은 간간히 바뀌었다. 이쁜 야경의 공원 사진이라든지, 선물로 의심(?)되는 피카추 인형 사진이라든지.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이것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연애 날씨 맑음'
전화가 왔다. 여자 친구를 소개해 준단다. 우리 사이에서 여자 친구 소개라 함은 결혼을 뜻한다. 식당을 예약했다. 녀석과는 비싼 음식을 먹은 적이 없었다. 그래도 자리가 자린지라 양식집을 골랐다. 그것도 제법 비싼. 물론 결제는 녀석의 몫이었다. 당일, 와이프와 함께 식당에 미리 갔다. 식당에서 예약이 안되니 미리 와서 기다리라 했다. 장사가 잘 되는 모양이다. 밖이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았다. 언제 올려나 싶던 차, 녀석이 보였다. 어느 여자분과 함께. 곧 내 앞에 녀석과 그 녀석의 그분(?)이 앉았다.
사이다 한 캔과 커피 한 캔. 그거면 충분했다. 각자 한 캔씩 들고 아파트 공원 내 벤치에 앉거나 마냥 동네를 돌아다녔다. 미친 듯이 수다를 떨며. 일단 시작하면 2시간은 기본이었다. 한 번은 점심시간부터 무한도전 시작 전까지 떠들었다. 장장 5시간에 걸친 수다였다. 녀석을 들여보내고 집에 오는 길. 턱관절이 뻐근했다. 녀석이나 나나 할 말 많은 취준생 시절이었다.
각자 서로의 연인을 데리고 만나긴 처음이었다. 녀석과 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와이프가 녀석의 그분에게 말을 걸었다. 되려 여자들끼리 수다가 벌어졌다. 나는 묵묵히 포크로 파스타 줄기를 감았고, 녀석도 묵묵히 숟가락으로 리조또를 한 술 떴다. 턱관절은 먹느라 바빴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무렵. 대학은 약속의 땅처럼 보였다. 그 땅에는 다음과 같은 단어들로 가득한 줄 알았다. 열정, 우정, 눈물, 환희, 성공, 도전, 패기 그리고... 연애, 사랑, 러브. 한 달쯤 지나자 우린 그 약속이 다른 의미라는 걸 알게 됐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여자 친구는 생기지 않았다. 과부의 심정은 과부가 안다고, 하루가 멀다 하고 모였다.
그러던 어느 날. 녀석은 내게 아르바이트를 해보자 했다. 마침 친누이가 피자헛에서 일하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녀석과 나는 피자헛의 뒷문을 두드렸다. 일 해보니 괜찮지 싶었다. 담당 매니저는 일손이 모자라다 했다. 나는 제일 친한 고등학교 친구를 불렀다. 그 녀석도 며칠 일해보더니 다른 친구를 불렀다. 새로 온 친구도 친구였다.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친구들이 하나 둘 모여, 피자헛 주방은 어느새 친구의 친구의 친구들로 북적거렸다.
후에 같이 일하던 친구들이 모임을 만들었다. '큰 포부'라는 뜻의 '대포'였다. 경영대 출신이 절반이라 그런지 회사처럼 정관도 만들었다. 덕분에 매해 정기총회만 하면, 정관 수정안을 두고 찬반토론 벌이느라 입에서 불을 뿜는다. 정관도 있는데, 통장이 빠질 리가. 통장을 만들려면 도장도 필요하다. 초대회장은 도장에 포부 할 때 '포'자가 아닌 박격포 할 때의 '포'(cannon) 자를 한자로 박아왔다. 덕분에 모임은 누가 봐도 남자들끼리(?)의 모임임을 단박에 알 수 있게 됐다. '큰 포부'라는 뜻은 대외용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만든 통장 이름은 자연히 대포통장. 예금주 이름에도 자연히 '대포' 자 들어갔다. 덕분에 초대 총무는 별생각 없이 은행에 갔다가 직원에게 의심 레이저를 받아야 했다. 명색이 '대포통장' 아닌가. 대포는 올해로 만 10주년이 됐다. 어쨌든.
녀석과 나는 모임의 개국공신이라 주장한다. 회비 인상 건과 함께 오래된 논쟁거리다. 우리의 주장은 단순하다. 녀석과 내가 피자헛 뒷문을 안 두드렸다면 이 모임은 없었다는 것이다. 몇몇은 아니라 한다. 그들 주장의 근거는 정관과 통장, 도장 그리고 멤버들 간의 연결고리 같은 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다.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 피자헛 지점은 지금 사라졌다. 그 자리엔 화려한 조명의 화장품 가게가 들어섰다.
몇 년 전. 내가 결혼하고 얼마 안 있은 후였다. 녀석을 만났다. 녀석은 내게 물었다. 결혼생활은 어떠냐고. 나와 와이프는 결혼 전에 연애를 나름 오래 한 터였다. 결혼했다 하여 딱히 새로울 건 별로 없었다. 그러니 해줄 얘기도 별로 없었다. 녀석은 내 결혼생활이 아니라 '결혼생활이란 것' 자체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녀석이 결혼했다. 그러니 이제 해주고 싶은 말이 생겼다.
결혼 축하한다. 그리고 환영한다. '정글'에 온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