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예프와 제시카 하이파이브 사건

스승을 향한 어느 제자의 빅엿 시전기

by 윤단






학교 명물, 장기예프

추억의 장기예프

장기예프. 유명 격투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의 캐릭터다. 아예 모르면 몰랐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렇다. 본인과 같이 학교를 다닌, 모 학교 동창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마, 필시, 그 친구를 떠올릴 것이다. 학교마다 으레 명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장기예프. 그 친구는 모 학교의 명물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이슈 메이커였달까.


고3 시절. 남학생만 가득한 고등학교에서 뭐 그리 재미있는 일이 있었겠나. 그런 급우들에게 장기예프는 큰 웃음과 화젯거리를 주는, 비범한 존재였다. 문제라고 한다면, 당사자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점. 장기예프는 억울해했다. 그럴 만도 했다. 자신의 행동으로 돌아오는 건 늘 반 친구들의 큰 (비)웃음과 환호, 선생님의 맹비난과 매 질 뿐이었으니. 물론 그런 점까지 친절히 신경 써주는 급우나 선생님은 없었다. 안타깝게도.




오 캡틴! 오 마이갓 캡틴! 제시카!

이분이 영어수업하셨으면 열심히 공부했을텐데....

수능 모의고사 영어시험 시간이었다. 전국단위 시험이 아니고, 학교 자체적인 시험이라 긴장감은 전혀(~~) 없었다. 한 달마다 치르는 관행적 시험이랄까. 당시 감독관은 우리 반 담임. 담임은 영어교사였다. 듣기 평가가 시작하고 교내 스피커로 혀 꼬부라진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라 쏼라쏼라하는데, 알아들 수 있는 건 연달아 계속 나오는 '제시카' '제시카' '제시카' 뿐이었다. 같이 시험 지문을 듣던 담임이 말했다.


"뭐? 재식아?"


엄숙한 시험시간에 웃음보가 터졌다. '재식'은 담임의 이름이었다. 이른바 몬데그린 현상. 왜 셀린 디온(혹은 셀리느 디옹)의 노래를 듣다 보면 그렇게 들리지 않는가? '오빠 만세'라고. 애들에게 제시카란 별명은 일종의 찬스였다. 학생들의 사사로운 대화에 감히 함부로, 불경스럽게 담임의 이름을 거론할 순 없지 않은가. 재미도 없거니와. 그렇게 담임은 제시카가 됐다. 소녀시대의 제시카는 데뷔는 커녕 아직 산수나 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미국 출신이니 영어 실력(특히 발음)이야 이미 제시카보다 뛰어났겠지만.




주술사 제시카의 마법 수업

이건 뭐 지금도 남의 얘기가 아니다.

제시카의 수업시간은 마법과도 같았다. 제사카의 수면 주술은 과연 깬 정신으로 앉은 사람이 몇일까 싶을 정도로 강력했다. 중저음에 느린 말투, 전무한 유머, 간간히 나오는(덧없는) 자기 자랑과 문법 위주 수업의 시너지 효과였다. 남자들은 대게 콘텐츠가 별로면 피지컬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물론 반대의 경우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제시카는 귀여운 별명과 달리 통뼈 체구에 각진 턱과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무엇보다 비율적으로 체구보다 훨씬 큰, 항공모함급의 발과 부채만 한 손을 가진, 거구의 중년 남자였다. 다만, 그 거구의 몸으로 어울리지 않는 행동들을 했는데, 두 손으로 든 책을 읽으며 가지런히 모은 두 발의 뒤꿈치 살짝살짝 든다든지, 안경 매만지며 눈을 부릅뜬다든지, 팔을 흔들며 일본 '카*오'사의 지# 시계 자랑한다든지 이런 것들이었다.


나처럼 눈 뜬 체 조는 기술이 없는 애들이 할 수 있는 건 제시카가 과연 수업시간 중 몇 번이나 뒤꿈치를 들고, 안경을 매만지며, 팔을 흔들어 지# 자랑을 하는지 통계를 내는 것 정도였다. 통계의 노가다적 괴로움이란 건 그 시절부터 훤했다. 불행한 것은 기껏 낸 통계에 통계학적 가치가 전무해서 지금껏 기억하는 자가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잘 순 없었다. 눈꺼풀이라도 감기는 순간, 두 손에 들린 책이 머리통을 강타하거나, 부채만 한 손바닥이 귀싸대기로 날아오거나, 노란색 PVC파이프가 엉덩이 위에서 솟구쳤다 내리 꽂쳤다. 대놓고 자는 짓은 용자의 것이었다. 장기예프는 용자였다.




뜻밖의 하이파이브

이런 분위기였음 좋았으련만...

장기예프가 앉은자리는 비교적 중앙. 공부에 대한 열의는 있었다. 성적이 안 따라와서 그렇지. 다만 영어는 포기했던 모양이다. 선생님 때문인지 뭔진 몰라도. 그날따라 장기예프는 대놓고 책상에 고개를 숙인 체 자고 있었다. 장기예프도 제시카와 비슷한 체형이었다. 그 체구로 정중앙에서 졸고 있었으니 눈에 안 띌 리가. 제시카가 장기예프에게 다가갔다. 일동 급우들의 시선이 장기예프에게 쏠렸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으리라.


'넌 이제 죽었다.'


장기예프 앞에 멈춰 선 제시카. 장기예프를 깨운다. 장기예프. 게슴츠레한 눈으로 고개를 든다. 제시카. 고개를 친히 숙여 장기예프의 얼굴과 마주한다. 그리고 손을 든다. 이른바 불꽃 싸대기의 시간이다. 모두 숨죽인 순간. 장기예프의 눈이 휘둥그레 진다. 그리곤...


짝!

장기예프 : 하하하. 제시카 선생님! 우리 하이파이브 해요! 제시카 : 그래! 착하구나~ 장기예프야~

정적이 휩싸인 교실 안에 손뼉 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기예프가 제시카와 하이파이브했다. 하이파이브한 두 사람은 잠시 눈을 껌뻑이며 서로를 응시했다. 잠시의 정적을 뚫고 학생들의 웃음보가 터지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두 사람은 안중에도 없이 복도가 떠나가라 웃어댔다. 휘둥그레진 눈을 연신 껌뻑이는 장기예프를 뒤로 하고 제시카는 이내 교단으로 돌아왔다. 교단에 선 제시카는 연신 장기예프를 향한 비난을 퍼부었다. 발 뒤꿈치 들기, 안경 매만지기, 팔 흔들기가 각각 1회씩 추가되었다. 연신 헛기침을 하면서...






뱀발.

장기예프의 고등학교 마무리는 성대했다. 수능 당일. 시험을 망쳐서 망연자실한 장기예프를 지역 방송국 기자가 붙들었다. 기자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아무튼 기자는 장기예프로부터 인터뷰를 땄고, 그날 밤 장기예프의 억울한 목소리는 지역 방송국 전파를 타고 뒷동산 꼭대기의 방송용 안테나를 유유히 지나 각 가정의 거실 티브이에서 울려 퍼졌다. 이렇게.


"학교에서 알려준 게 하나도 안 나왔어요!!!"

학교에서 알려준게 없어서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학교가 발칵 뒤집혔음은 두말할 나위 없겠다. 장기예프는 선생님들에게 돌아가며 있는 욕, 없는 욕, 욕이란 욕은 죄다 먹었다. 망친 수능에다 덤터기 욕까지 먹은 장기예프는 결국 마지막까지도 억울 억울 억울해하다 졸업했다. 아무튼 학교 명물다운, 장엄한 고교생활의 마무리였다.(그 친구 요새 뭐하고 지내려나... 쿨럭;)





매거진의 이전글dear your wed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