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거실엔 여러 감정선들이 엇갈린다
여기 다람쥐 한 마리가 있다. 섬세한 다람쥐. 다람쥐는 곰이 되고 싶었다. 우직하고 든든한 곰 말이다. 다람쥐는 얍시롬하고 잔머리 잘 굴리는 스스로가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람쥐는 여우를 만났다. 다람쥐는 여우 앞에서 곰처럼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었지 아는 데는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결국 다람쥐는 다람쥐였고, 여우는 여우였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지만, 시간은 대가 없이 마냥 문제를 해결해 주진 않는다. 사생결단 하듯이 이마를 들이박고, 이빨을 드러내 으르렁 거리고, 서로에게 날카로운 발톱을 상처 주길 여러 번. 지금 돌이켜보면 들이박기 전에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었다. 야생에서 다람쥐는 여우의 밥이라는 걸.
충돌이 마냥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통증이 병을 파악하고, 치료하게 만드는 것처럼, 거듭된 전투(?)는 여러 부분에서 발전적인 합의 내지 일시적인 휴전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전투적인 시절이 끝나자, 곧 평화가 찾아왔다. 평화의 기본은 서로의 공통분모를 찾는 것부터 시작한다. 다람쥐고, 곰이고, 여우고 간에 게으름은 천성이었던 모양이다. 같이 살게 된 다람쥐와 여우는 시간만 나면 빈둥빈둥거렸다. 살이 피둥피둥 오르자 둘 다 제법 곰처럼 보이게 됐다. 그럭저럭 다람쥐의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접점이 없는 부분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더러 이 둘의 감정선은 서로 나란히 평행을 이루며 만날 줄 몰랐다. 종종, 더러, 가끔, 본의 아니게 이런 식이다. 늘 그래 왔듯이.
어느 날 곰을 꿈꾸는 다람쥐는 인터넷의 바다를 헤엄치다 마음이 울컥한다. 우연히 본 뮤직비디오가 퍽 로맨틱하고, 무척이나 애잔했던 모양이다. 다람쥐는 거실에서 빈둥거리던 여우에게 다가갔다. 냅다 티브이로 뮤직비디오를 허락(?) 없이 상영했고, 순간 여우는 발끈한다. "잘 보는 걸 왜 돌리느냐"였다. 여우는 요새 드라마에 흠뻑 빠져있다. 여우는 드라마가 거의 끝나가니 다 보고 보겠다 딜을 걸었다. 다람쥐는 나름 합리적이라 여겨 기꺼이 받아들인다. 딜은 성사됐다. 기다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다람쥐는 영상을 틀고 소파에 누웠다. 여우는 소파 아래에 등을 기댔다. 영상이 나오자 다람쥐의 눈을 티브이가 아닌 여우의 튀통수를 향했다. 여우. 하품 1회, 핸드폰 만지작 2회 했다. 화면? 더러 종종 가끔 힐끔힐끔 정도 후 다시 핸드폰 1회 만지작. 곰과를 자처한 다람쥐 이건만 내적 흥분의 도가니 상태에 빠져 버린다. 사극 드라마에서 자주 보는 그 장면. 도탄에 빠져 통렬하게 울부짖는 민중들의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같이 보자 했건만... 최소한 성의는 보여야 하는 것 아니더냐아아아아아!!!!
다람쥐 뮤직비디오를 멈춘다. 여우, 본능적으로 상황 파악 완료한다. 엉덩이에서 꼬리 아홉 개가 솟구친다. 갖은 아양과 알랑방귀가 폭발적으로 투하된다. 아홉 갈래의 털 뭉치 꼬리가 머리 위에서 살랑살랑 춤을 춘다. 웃기면서 열 받는다. 화나고 어이없다가도 헛움음이 나온다.
눈 앞에서 알랑방귀 뀌고 있는 사람이 분명히 존재하긴 하는데, 난 대체 누구랑 사는 건가 싶기도 하고, 과연 이렇게 감정선 안 맞아서 어찌 사나 싶은 마음부터, 결국 곰인 척 연기한 내 잘못인가 하는 고민이 드는 가 하면. 콩깍지 씐 시절, 이 모든 상황을 뻔히 미리 보고도, 곧 죽어도 고(GO!)를 외친 순간들부터 해서 이러다 어느 순간 지나면 누군가의 말처럼 서로가 서로의 가구가 되어가는 것 일 까는 생각까지. 정신 차리고 나니 눈 앞엔 여전히 꼬리 아홉 개 흔드는 여우가 있었다. 여우도 살아보겠다고, 오늘 밤 무사히 지나가자는 간절한 마음에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이다. 가엽은 것. 쩝.
뮤직비디오를 다시 틀었다. 그렇게 약속했던 눈이 온다 하건만, 로망이고 낭만이고 분위기고 자시고 김이란 김은 몽땅 샌 후였다.
언젠가 강원도 산골짜기로 이사한, 어떤 사람이 자신은 눈을 눈이라 안 부르고, 하얀 똥이라 부른다 했다. 그땐 크게 웃었다. 이젠 더 이상 남 얘기도 아니고, 웃을 일도 아니다.
여우는 지금 예능 프로 시청 중이시다. 꽤 재미있는 모양이다. 오늘도 거실에는 여러 개의 감정선이 엇갈린다. 개 중에는 평행선도 있기 마련이다. 더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