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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 little kitty Aug 21. 2022

내가 얼마나 힘든지 엄마도 한 번 느껴봐

투사적 동일시는 분노 발작의 기본원리

"엄마, 엄마는 내가 이렇게 짜증을 내는데 왜 화를 안 내?"

"......"


어제의 일이다. 무엇 때문인지 기억도 안 날 일로 작은 딸이 소파에서 울면서 화를 내고 있었다. 피곤하거나 뭔가 잘 풀리지 않을 때, 해야 할 일이 많을 때면 아이는 꼭 서너 살 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며 짜증을 낸다. 실컷 놀고 난 뒤에도, 그토록 원하는 것을 다 해 준 후에도 아이는 꼭 그렇게 마지막에 벌써 끝이냐며 짜증을 내고 운다.


'얘가 울면서도 내 행동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화를 내기를 기다렸던 걸까?'


사실 나는 아이가 울고 막무가내로 짜증을 부릴 때 당연히 화를 내기도 한다. 아이가 울면서 짜증을 부리는데 아무렇지 않을 부모는 없다.


Bion에 의하면 사람들은 처리되지 않은 날것 상태의 감각, 감정, 인식과 같은 베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아직 의미 없는 것들이다. 유아에게는 아직 이를 처리할 심리 장치가 없기 때문에 불쾌감이 우세하게 되면 베타 요소가 대상에게 투사된다. 대상은 자신에게 투사된 것을 담아내고, 동일시하고, 변형시켜, 보다 견딜 수 있는 형태로 되돌려 준다. Bion은 이러한 과정을 알파 기능이라고 하였다.


육아를 하다 보면 내가 감정 쓰레기통이 된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슬그머니 올라오는 것이 바로 억울함이다. 도대체 내가 왜,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야 하는 건데?라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온다. 또 한 가지는 무력감이다. 부모로서 아이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무력감이 나를 엄습한다. 시험에서 좋지 않은 점수를 받았을 때와 비슷하다.


그런데 Bion의 이론에 따르면 아이에게 의미 있는 대상은 쓰레기를 담아내야 한다. 때로는 변형시켜 보다 나은 형태로 돌려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럼 나는 우는 아이에게 <담아내기>를 하고 있었던 것인데, 아이는 왜 내 행동에 감사하기보다 의문을 품었던 걸까? 



투사적 동일시


Melanie Klein은 편집-분열성 시기*에 일어나는 유아의 심리적 과정을 묘사하였다. 유아는 내면의 나쁜 대상(죽음 본능의 심리적 표상) 들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 있기 때문에 분리하여 다른 사람 속으로 투사한다. 또한 유아는 항문기 충동에 의해 자신의 위험한 물질을 어머니의 내부로 집어넣으려 한다.
Klein은 이렇게 원하지 않는 자신의 일부분이나 내부 대상을 분리시켜 투사하고, 해를 입히려 하고, 조종하고, 소유하려고 하는 것을 투사적 동일시라고 하였다.
멜라니 클라인 (1882-1960) 오스트리아의 대상관계이론가이자 아동정신분석가. https://m.blog.naver.com/europa-rose


이것이 단순한 투사가 아니라 투사적 동일시인 이유는 타깃으로 하는 대상이 분명하고. 대상의 반응을 모니터링하기 때문이다.


*편집-분열(자리): Klein이 주장한 신생아의 죽음 본능과 파괴적 공격성을 처리하는 또 다른 방법. 편집은 박해, 즉 나쁜 대상이 나를 괴롭힌다고 느낀다는 뜻이고 분열은 한 대상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쪼개서 부분으로 관계다는 뜻이다.

 

*동일시 : 대상의 특성을 나름 소화 흡수해서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정상 심리구조 발달에 필요한 내재화의 한 종류이다. 내재화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학습 같은 것이다.


동시에 아이는 어머니가 자신이 느낀 것을 느끼게 함으로써 이해받았다고 느낄 수 있다. 자신의 느낌을 말로 설명할 수 없기에 어머니가 그렇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결국 아이는 투사적 동일시 과정을 통하여 어머니와 소통을 한 것이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아이는 의식적으로 계획하고 자신의 느낌을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극도로 분노할 때 미리 대사와 행동을 계획하지 않듯이, 이것은 아이도 모르게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면 부모가 감정의 쓰레기를 받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대개 <담아낸다>고 하면 억지로 참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아이도 엄마가 억지로 참고 있는 거지 마음속에 분노가 있다는 것을 안다.

'너 한 번 어디까지 하나 내가 두고 보겠어!'

겉으로만 화를 참을 뿐 분노의 핑퐁이 시작되는 것이다.


최영민 교수님은 이것을 상담가와 내담자의 상황으로 설명해 주셨다.

내담자가 단순한 불만을 넘어, 어떻게든 상담가를 평가절하하고, 무기력한 사람으로 만들 때까지 불만을 표시할 때가 있다.


병원에서도 그렇게 하시는 환자분들이 간혹 있다.

정말로 하고 싶은 얘기는 "저를 잘 치료해 주시고 신경 써 주세요."인데, 반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정말 불만이 가득해서 극도로 화를 낸다면 화를 내고 다시는 오지 않아야 하는데, 이런 분들은 자신의 의견이 수용될 때까지 계속 오면서 직원들을 괴롭힌다. 그 이면에는 <진정으로 공감받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는 것이다.


교수님의 해결 방법은


1. 상담을 잠시 멈춘다.

2.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기분이 나쁘더라도 억지로 피하거나 방어하지 않고 그대로 느껴 본다.)

3. 그 감정이 무력감이나 좌절감, 열등감 같은 것이라면, 그것이 현재 내담자가 느끼고 있는 것임을 인지한다.

4. 상황에 적절한 공감의 말로 되돌려준다. 즉, 중립적 공감을 표시한다.

(예: 갑자기 약물이 바뀌었는데 설명을 충분히 듣지 못하면, 환자로서 제대로 치료받고 있지 못하다고 느껴질  수 있을 겁니다. 치료가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렇게 화를 내신 것 같습니다.)


양육 과정에서 일어난 분노 발작에 대한 대처는 다음과 같다.


"아이고 우리 똥강아지 화났어!"
엄마는 아이가 투사한 안 좋은 감정을 그대로 받아준다. 다만 '나에게 화내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괴로움은 있으나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의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부모도 아이의 반응이 기분 좋은 것은 아니나 격렬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따뜻하게 안아주고 말로 얼러준다.

아이는 자신의 괴로움과 공격성을 투사했는데 부모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자신이 동화, 흡수할 수 있는 감정이다. 그래서 얼러 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아이의 나이와 성격에 따라서 <얼러주는 것>보다 그저 기다려 주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 우리 아이들 그다. 때로는 그런 말과 행동이 아이를 더 자극하는 경우가 있곤 했다.


"애가 방방 날뛰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라고 말씀하는 분이 있을 수 있다.

나조차도 좋은 감정이 하나도 없는데, 억지로 좋은 말을 하면서 아이를 달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 부분에서는 충분히 나도 동의한다. 그러니 억지로 좋은 말을 할 필요는 없다. 대신 맞불을 놓지는 않았으면 한다.


왜냐하면 투사적 동일시는 <악순환의 고리>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거기에 말려들지, 말려들지 않고 고리를 끊을지는 인격적으로 더 성숙한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비결은 아이가 투사하는 무력감과 좌절감을 있는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부모로서 훌륭해야 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자식일 때도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의 울음소리는 우리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실패한 부모처럼 느끼게 만든다.


그런데 이미 100년 전 Melanie Klein은 그것이 일종의 <의사소통 작전>이자 <살기 위한 방어> 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투사적 동일시라는 개념을 기술한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의 부모들은 그 악순환의 고리에 말려들지 말고, 아이와 소통하자고 말씀드리고 싶다.



10년 전, 병원에서 근무할 때 4살 정도 된 남자아이가 진료를 보러 왔다. 평소에도 자주 오던 아이였고, 엄마가 아기띠를 하고 데려오는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 진료 순서가 되었는데, 아이가 갑자기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대기실에서 보던 TV 만화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인지, 그날따라 진료 보기가 싫었는지 나도 이유는 모른다. 엄마가 동생을 안고 아이를 재촉하자, 아이는 곧 분노 발작을 일으켰다. 엄마는 달래도 보고 혼내도 보았지만 아이는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엄마는 소리를 지르며 아이를 정신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간호사와 내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어느 정도 사태가 진정된 후, 엄마는 앉아서 한참을 울었다.


세상에 육아만큼 고독하고 막막한 일도 드물다. 오은영 선생님처럼 누군가 현장에서 나를 다독이거나 코치해 준다면 좋으련만. 현실에선 그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때는 엄마를 말리려고만 했지만, 이제는 그 손을 잡아드리고 싶다. 그리고 아직도 기억나는 아이의 이름도 불러주고 싶다. 


"O준아, 이제 너도 많이 컸겠지? 선생님이 그때 엄마를 진정시켜 드리고 잘 말리지 못해서 미안했어. 너도 네가 왜 그랬는지 모를 거야. 이제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해 주고 싶어. 그때 너는 공감받고 소통하고 싶었던 거라는 걸. '내가 얼마나 힘든지 엄마도 느껴봐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었다는 걸."



인용한 책

-대상관계 이론을 중심으로 쉽게 쓴 정신분석이론, 최영민 저


커버이미지 출처

https://naver.me/F5boEbU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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