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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 little kitty Aug 29. 2022

홀로 있는 그런 고양이는 없다

홀로 있을 수 있도록 옆에 있어주는 엄마

아침 시간, 집안일을 대강 마무리했다. 지친 몸으로 안방에서 책을 읽고, 샤워를 하고, 30분 정도 쪽잠을 잤다. 어제 고양이들이 새벽 2시까지 사냥놀이를 한 탓에 제대로 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잠에서 깨 거실로 나와 보니 고양이들이 없다. 대개 거실에서 자는데 오늘은 작은 아이방에 가서 자고 있다.


내가 거실로 나와서 글을 쓰기 시작하니, 두 고양이는 내 곁으로 와서 눕는다. 어차피 혼자 자는 건데 굳이 자리를 옮겨 사람 옆에서 자려고 하다니. 그런데 옆으로 와서 붙어 자는 것도 아니고 나와는 적당한 거리에서 잔다. 딱히 요구사항도 없다.


There is no such thing as a baby.
 -D. Winnicott


무슨 말일까?

직역하면 '한 아기와 같은 것은 없다.' 겠지만, Winnicott은 다음과 같은 각주를 달았다.


우리가 유아를 발견할 때는 언제나 모성 돌봄을 발견하게 되고, 모성 돌봄이 없으면 유아도 존재할 수 없음을 뜻한다. (Winnicott, 1958)


즉 a baby는 한 아이가 아니라 홀로 있는 아이라는 뜻이다.


모성 돌봄이라.

현대 여성, 특히 아이를 일정 시간 맡겨 키워야 하는 직장여성에게 <모성>이라는 단어는 듣기만 해도 숨이 막힌다. 전업주부라고 해도 대가족이 아니기에 독박 육아를 해야 하는데, 먹고 입히기만 하는 시대가 아니기에 역시 숨이 막힌다. 시대가 바뀌어도 모성이라는 단어에는 너무 크고 많은 기대와 의미가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위니컷이 기술한 참 좋은 어머니(good enough mother, 그만하면 좋은 어머니)의 역할에는 안아주기 환경이라는 개념이 있다. 안아주기 환경은 대상으로서의 어머니환경으로서의 어머니로 나뉜다. 유아가 흥분된 시기에는 자발적 욕구와 몸짓에 거울 반응을 해 주고, 고요한 시기에는 아이를 침범하거나 요구하지 않고 함께 있어주는 것(non demanding presence)이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요즘 한국의 육아는 Winnicott이 말한 안아주기 환경과 거리가 있다. 아이가 홀로 있을 때 그냥 옆에 있어주기보다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자꾸 일정을 짜고 데리고 나간다. 하루 종일 열심히 발로 뛰는 대부분의 한국인답게 아이가 홀로 있을 땐 엄마도 무언가를 해서 최대한의 효율을 추구한다. 그리고 아이가 막상 놀아달라고 할 때는 지치고 바빠서 제대로 놀아주지 못한다.


아이의 자발적 몸짓에 따라 있어 주고 놀아주는 것보다, 외부에서 <양질의 교육>과 <새로운 자극>을 공급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여기는 사회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남는 쪽에 가치를 두는 문화다. 나도 한동안 그렇게 아이를 키웠다고 생각한다. 일을 하기에 아이랑 보낼 시간이 많지 않았고, 1분 1초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한 발 물러서서 나의 육아를 돌아본다.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하고 학교에 다니는 시기가 된다면 적절한 외부 자극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언어가 완성되기 전인 만 3세 이전의 아동에게 필요한 모성의 본질은 안아주기 환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양이로 대표되는 관계회피 인류라면, 대상 엄마보다 환경 엄마를 더 필요로 할지 모른다. 사람이 옆에 있기에 편히 잘 수 있는 고양이처럼 말이다.


관계회피 인류를 닮은 나의 큰 아이는 환경 엄마를 더 원했다. 아이와 있을 때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고 질문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방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해 주는 것 없이 같은 공간에 머무를 때 아이는 훨씬 안정되고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Winnicott의 이론을 공부하기 전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해 주는 것이 없는데 왜 옆에 있어야 할까? 환경 엄마는 왠지 허무하다. 시간낭비처럼 느껴진다.


 반면 작은 아이는 계속 대화하고 놀아주어야 하니 뭔가 해 준다는 느낌은 드는데, 너무 많이 놀아달라고 해서 피곤했다. '이제 좀 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거나 알아서 친구랑 놀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왜 내가 쉬고 싶을 때만 놀아달라고 하는지 원망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모성이 도대체 무엇인지 일부라도 답을 구하고 싶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진료실을 방문하는 부모님들에게 답을 하기 위해서도 말이다. 국가에서 지원하는 영유아 검진에서 부모님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질병보다 정서였고, 이론보다 실제였다. 이제 Winnicott의 이론을 공부하고 나니, 아이가 홀로 있을 수 있도록 옆에 있어주거나 원할 때 놀아주는 것이야말로 소아청소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로서 수많은 아이와 엄마들을 관찰하고 고민한 그가 제안한 모성임을 깨닫는다. 모성이라는 단어에 너무 많은 신화를 부여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다.


 언젠가 우리도 이 외로운 육아가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짐이 되지 않기를 소한다.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출산과 육아는 젊은 세대에게 큰 짐이다. 그 모성에는 돈과 시간, 주양육자의 희생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지금 부모가 될 20-30대들도 그렇게 자라났고, 사회 문화적으로 그것이 최선의 부모라고 여기는 듯하다.


 그런데 100년 전 태어난 Winnicott이 기술한 <모성>에는 조금 다른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 많은 단어 중 아이의 '자발적 몸짓'이라는 단어가 기억에 남는다. 조용 혼자 있고 싶은 아이에게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학원에 가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엄마와 시시한 놀이를 하며 즐거워하는 아이에게 엄마는 바쁘니 친구랑 놀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사뿐사뿐 홀로 우아하게 걸어가는 고양이를 번쩍 안아 올리지 말고, 사냥놀이하고 싶어 뛰어다니는 고양이를 말리고 싶지 않다. 고양이와 아이에게는 각자 <자발적 몸짓>이 존재할 테니 말이다.


Winnicott은 믿을 만한 어머니와 함께하며 유아가 혼자만의 편안함을 느끼는 상태를
'I am alone' 상태라고 하였다. 어른들의 쉼의 상태에 해당되며, '자아 관계성(ego-relatedness)라고도 불렀다. 자아 관계성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홀로 있음의 경험은 곧 자기를 경험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자기의 정체성과 연결되는 경험이다.


참 좋은 엄마가 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는 당신에게, 그리고 나에게, 아이의 자발적 몸짓에 따라 반응해 주고, 홀로 있기 위해 함께 있어주기를 제안해 본다. 대신, 엄마와 모성에 대한 너무 많은 기대는 사양하고 싶다.




참고한 책> 최영민, <대상관계 이론을 중심으로 쉽게 쓴 정신분석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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