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아실 일을 처음 시작할 무렵,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라 사소한 문제만 생겨도 잔뜩 긴장하고 힘들 때의 일이다. 다운 증후군 환아가 태어났다. 대개 산전에 진단이 되므로 이미 부모님이 알고 있을 땐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부모 입장에서 반가운 소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중증 심장 기형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대개 퇴원 시 안정된 상태로 보낼 수 있다.
그런데 이 아기는 엄마가 아이의 상태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부모님 면담 시간에 들은 충격적인 대화.
"저는 못 키워요. 입양시켜주세요."
산전에 다운증후군일 것 같다고 산부인과에서 들었지만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낳았다는 것이다. 산모의 나이가 만 35세 이상인 경우에 다운 증후군의 위험도가 증가하는데, 간혹 20대 산모에서 다운증후군 아이가 태어나는 경우는 받아들이기 힘들고, 실제로 산전 진단이 잘못된 경우도 있기는 하다. 이 아기의 어머니는 만 35세 에 가까운 연령이었고 산전에 충분히 설명을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입양을 시켜달라니 내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가 어릴 때 큰 화상을 입어서 얼굴에 흉터가 있고, 이런 장애를 가지고 살아와서 너무 많이 힘들었는데
장애가 있는 아이를 어떻게 키워요? 저는 못해요."
"......"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얼굴에 화상 흉터가 있는 것이 장애라는 말씀도, 그로 인해 인생이 힘들었다는 것도 내가 직접 겪지 않은 일이고 감히 고통의 크기를 판단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것과 다운 증후군은 상관이 없다는 말조차 꺼낼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내 얘길 들은 신생아실 수간호사가 껄껄 웃으며 흔쾌히 나서 주었다.
"선생님, 내가 면담할게요. 부모가 멀쩡히 있는데 입양을 어떻게 시켜요? 법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에요.
내가 설득해 볼 테니까 기다려 보세요."
지금 생각해 보면, 다운증후군의 자연경과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지금 아이 상태가 중증이 아니기에 병원에 잘 다니고 관리하면 잘 키울 수 있다고 지지와 격려를 보내주고, 기다려 주면 되는 거였다. 수간호사가 나 대신한 일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신생아실 의사로서도 초보였고 엄마가 되어 본 적도 없었기에 같이 얼어붙어 버렸나 보다. 설득이 잘 되어 아이는 예정대로 엄마, 아빠와 무사히 퇴원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약 1 년 후, 내가 일반 소아 병동에서 일하며 복도를 걸어가고 있을 때 모르는 어머니 한 분이 나에게 인사를 했다. 유모차에 아이가 타고 있었지만 덮개가 씌워져 있어서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작년에 신생아실에서 퇴원했던 아기 엄마예요. 몇 달 전 심실중격 결손으로 수술받았어요. 그것 빼고는 건강해요."
아이와 엄마는 지인을 병문안 온 것 같았다.
"어머, 그러셨어요? 정말 다행이에요. 예쁘게 잘 키우셨네요. "
나는 아이를 한 번 청진해 주었고, 15개월 정도 된 아이의 가슴에는 개흉 수술 자국이 선명히 보였다.
개흉 수술 자국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조금 아팠다. 아이도,엄마도 흉터만큼의 아픔과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년과는 사뭇 다른 엄마의 표정이 나를 당황하게 했다. 얼굴의 화상흉터는 그대로였지만 무언가를 극복한 사람 같았고,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도대체 장애란 무얼까?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애착 장애. 굳이 장애라는 말이 붙어야 할지 애매모호한 병명에도 장애는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의 작은 조카 예쁨이(가명)는 생후 첫 해에 성장 부진을 겪었다. Failure to thrive, 국어로 번역하면 또 장애라는 말이 들어갈까 봐 성장 부진으로 대체한다. 출생 후 두위, 신장, 체중이 또래 집단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경우 기질적인 문제가 있는지 검사를 한다.
대개의 성장 부진 아이들이 그렇듯 많은 검사를 하고도
그냥 특별한 진단을 받지 않길 바랬다. 나도 한 해를 지켜보면서 많은 고민을 하고, 검사를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하긴 했지만, 내 식구니 아니길 바랬다. 야속하게도 대학병원의 교수님은 아이 얼굴을 보자마자 특정 염색체 이상을 언급했고, 검사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검사 결과를 듣고 온 날, 온 집안이 침통한 분위기가 되었다. 아이 엄마는 정말 많이 울었다. 대학병원 진료를 권유했던 나는 큰 죄를 지은 것 같았다. 또 다시 얼어붙어 버리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내게 예쁨이의 염색체 이상은 적어도 <서러움>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너무 늦게 진단되는 것이 문제지 시기에 맞게 건강관리를 해 주고 필요한 의학적 도움을 주면 얼마든지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은 내 전화영어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잔뜩 가라앉은 분위기로 수업에 임하던 나에게, 필리핀 원어민 선생님은 이런 얘기를 해 주었다.
"Different means special. We need to tell her she is so special."
나는 그의 말이 공허한 위로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는 미국에서 유학한 인재였지만 가난했다. 기차와 버스를 오래타고 출근해 일을 하고, 새벽에는 집에서 갓난아이를 돌보았다. 하루 종일 지쳤을 아내를 위해 장도 보고 집안일도 하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었다. 가난한 삶에 대해 그는 솔직했다. 그의 위로는 진심이었고,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그의 삶처럼 긍정적이고 아름다웠다.
한참이 지나 예쁨이는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어간다. 아직 키가 작다. 하지만 누구보다 섬세하고 예쁜 아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의 안데르센 각색 동화 <21세기 엄지공주>는 예쁨이를 위한 동화다. 키 작은 소녀에게 바치는 이야기.
예쁨이가 달라서 특별하지 않았다면 쓰지도 않았을 이야기다.
내 아이들도 예민하고 불안도가 높아, 때로는 불편을 유발하는 다름의 상황에 처한다. 변화를 두려워하기에 새로운 환경에서는 익숙해질 때까지 도움이 필요하다. 감각을 건드리면 모든 것을 멈춘다. 무기능 상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런 다름이 장애로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어쩌면 장애라고 불릴 만한 것은 세상에 없는지도 모른다. 다름은 특별함이고, 그 특별함은 나의 존재 이유다. 내가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로 인한 불편은 내 몫이다.
또 아이가 어릴 때는 어떤 점이 다른지, 그래서 어떤 보살핌과 배려가 필요한지 부모가 알아주어야 한다. 다르다는 것은 다름을 규정짓기 위함이 아니라 다르기에 신경 쓰고 배려해 주어야 할 것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불안이 인간에게 고통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신호와도 같은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다름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장애라는 말 대신 다름을 제안한다. 다름의 또 다른 이름은 <특별함>이다.
어른들이 <다름>이라는 말에 <서러움>이나 <부끄러움>을 붙이지 않는 그날까지, 나는 글을 쓰고 예쁨이와 같은 아이들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