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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 little kitty Sep 17. 2023

영화 <잠>을 보고 나서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유

영화 <잠>을 보고 왔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아직 안 보신 분은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는 수면 장애에 관한 내용입니다. 신혼부부 현수(이선균)와 수진(정유미)은 출산을 앞두고 있습니다. 어느 날 현수는 자다가 "누가 들어왔어."라고 중얼거립니다. 그날 이후 는 자다가 피가 날 정도로 얼굴을 긁거나, 냉장고 문을 열고 날고기와 계란을 먹어 치는 엽기적인 행동을 합니다. 수면 중 벌떡 일어나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려 하더니, 급기야 반려견까지 해치고 맙니다. 침이 되어 잠에서 깨면 멀쩡해집니다.


수진이 인터넷으로 병명을 검색하는 과정에서는 '몽유병'이라고 나오지만, 정확한 병명은 REM 수면 행동장애입니다. 몽유병은 증상이 비슷하지만 비 REM 수면(수면의 초반부)에 일어나며 대개 소아에서 나타납니다. 남아에 더 흔하며 가족력이 있습니다.


REM 수면 행동장애는 대개 50세 이후 증상이 나타나지만 더 어린 나이에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수면 후반부에 자주 나타나며 반복적으로 각성 삽화, 즉 소리를 내거나 다양한 행동, 꿈과 연관된 행동 등을 동반합니다. 깨우면 잠에서 즉시 깨어나며 의식이 명료하고 주변에 대한 인지가 가능합니다. 반면 몽유병은 자다 깨서 돌아다닐 때 의사소통이 불가하고 깨어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1)


REM 수면이란 무엇일까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Rapid Eye Movement, 눈동자가 빨리 움직이는 현상을 보입니다. 어찌 보면 수면임에도 불구하고 각성상태와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눈동자가 빨리 움직이고, 시각적 연상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REM 수면 시 glycine이라는 물질이 분비되는데 이는 척수에서 운동뉴런을 억제해 골격근이 마비됩니다. 현수가 앓고 있는 REM수면 행동장애에서는 이러한 근육의 무긴장상태가 없어 수면 중 위험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1)


우리 뇌의 각성상태를 만들어주는 부위는 전뇌기저핵과 뇌간인데, 전뇌기저핵에서는 아세틸콜린이 뇌간에서는 세로토닌과 노르에피네프린이 분비됩니다. 수면 시에는 이 신경전달물질들의 분비가 억제되는데, REM 수면에 이르면 세로토닌과 노르에피네프린은 억제되어 있지만 아세틸콜린은 각성상태보다도 늘어납니다. 이는 감정과 기억회로를 담당하는 변연계와 대뇌 연합시각영역을 활성화시켜 생생한 '시각 이미지의 정서적 분출'을 만들어 냅니다. 세로토닌은 상상과 현실을 구분해 주고, 노르에피네프린은 주의 집중에 필요합니다. 따라서 REM수면에서는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고, 시각적 이미지를 연결하여 맥락이 있는 이야기로 만들지 못합니다. 2)


REM수면 행동장애는 잠을 방해하면 악화되므로 치료를 위해 적절한 수면위생을 갖추고, 자다가 다치지 않도록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증상이 심한 경우 잠들기 전 수면진정제에 해당하는 clonazepam 등을 투여할 수 있습니다. 1)


그런데 이 영화의 진짜 묘미는 남편의 수면장애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아내 수진의 망상과 분열입니다.

수진은 남편의 증세에 차도가 없자, 진료실에서 의사의 얼굴을 향약병을 집어던집니다. 그리고 친정 엄마가 데리고 온 무당의 말을 믿기 시작합니다. 


친정엄마가 데리고 온 무당은 근거도 없이 귀신의 존재를 확신합니다. '귀신이 붙었다. 남자를 둘 데리고 산다.' '개 짖는 소리, 아기 우는 소리 없이 너와 단둘이 살고 싶다고 한다.'라고 말하며 공포와 불안을 조성합니다.


반면 의사는 '확실히 나을 수 있는 거냐?'는 물음에 '경험적으로 가장 효과 있었던 약을 처방하는 것.' '환자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확률에 근거한 추측을 합니다. 확실한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답답하고 바보같이 보이지만, 과학이란 경험에 근거하여 최선의 선택을 내리는 것이므로 늘 틀릴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이 부분은  미신과 과학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수진은 점점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현수의 증세가 나아져도 굿을 하며 등에 붉은 글씨를 새겨서 귀신이 들어오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온 집안을 부적으로 도배해 놓고 그에게 귀신이 붙었다는 근거를 PPT를 사용하여 프레젠테이션 합니다. 미신으로 가득 찬 배경을 놓고 논리와 과학으로 망상을 포장한 그녀를 보면 우스꽝스럽습니다. 과학을 포기하지 못한 미신이랄까요?

 

사랑스럽고 똑 부러지던 그녀가 갑자기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수진은 이 사건을 통해 편집-분열자리에 놓였다고 보았습니다. 편집-분열자리는 오스트리아의 아동정신분석가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1882-1960)이 제시한 개념입니다. 그녀는 갓 태어난 아기의 정신세계는 하얀 도화지가 아니라 파괴적 공격성과 환상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습니다. 아기는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가 젖었을 때 불쾌감을 느낍니다. 아기는 불쾌감을 처리할 능력이 없기에 이를 외부로 투사합니다. 나를 괴롭히는 '악마'가 있고, 악마가 나를 괴롭히기 때문에 괴롭다고 믿는 것이지요. 아기는 아직 세상을 객관적으로 인지하지 못하기에 환상 속에서 모든 것을 느낍니다. 환상이지만 아기에게 현실처럼 생생합니다. 아기는 환상 속에서 악마를 공격하고 파괴합니다. 이것이 바로 편집-분열자리입니다. 3)


편집-분열자리에 대비되는 것은 우울자리입니다. 편집-분열자리에서 아기가 파괴한 것은 악이지만, 아기에게는 아직 자기를 돌봐주는 엄마와의 관계뿐입니다. 처음에는 악마와 천사가 둘이라고 생각했지만, 생후 3-4개월부터 시작되어 6개월 무렵이 되면 천사와 악마가 하나임을 인지할 수 있게 됩니다. 괴로울 때 악마를 파괴하면 천사까지 파괴됨을 알게 되고 이를 후회하는 것이 우울자리입니다. 이때 아이는 죄책감과 상대를 회복시키고 싶은 소망을 갖게 됩니다. 3)


편집-분열자리와 우울자리는 평생을 두고 반복됩니다. 성인이 된 우리는 괴로울 때 편집-분열자리에 놓여도 우울자리로 다시 자리매김합니다. 그러나 정신병리가 깊은 사람은 우울자리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극 중 수진은 <둘이 함께라면 극복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는 가훈을 벽에 걸어놓습니다. 집을 나가려는 남편을 붙잡을 때에도 그 가훈을 들이댑니다. 친정 엄마와의 대화로 볼 때 그녀는 한부모 가정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아랫집 여자가 "결혼이 별거냐, 답이 없다 싶으면 때려치우면 된다."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농담으로 받아치지 못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 집에 오자 현수는 아직 수면장애 증상이 있으니 집 근처 오피스텔에서 따로 자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녀의 두려움은 아마도 '남편이 없는 가정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설령 하룻밤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이러한 비정상적 공포는 그녀를 분열시킵니다. 건강한 남편이 있는 가정은 옳고, 그렇지 않은 가정은 나쁩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자신과 남편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했던 아랫집 할아버지 귀신은 악마입니다. 아기의 불쾌감이 악마를 만들어낸 것처럼 그녀의 '한부모가정'에 대한 공포가 악마를 만들어냅니다. 악마가 나를 괴롭히고 있으니 제거해야 합니다. 파괴적 공격성은 귀신 붙은 남편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전동 드릴로 할아버지의 딸인 아랫집 여자를 위협합니다.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편집 분열자리에 있는 사람의 특징은 '나의 믿음은 절대로 틀리지 않았다'라고 생각하며, 내 믿음을 따르지 않거나 방해가 되는 사람은 폭력을 사용해서 공격하고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가장 무서운 것은 귀신이 아니라 편집 분열자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인간입니다. 그 정신병리는 매우 깊어서 논리적 설명으로 교정되지 않습니다. 현수의 연기일지도 모르는 귀신의 대사에는 아랫집 여자에게 '꼭 이사 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클라인에 따르면, 편집-분열자리를 극복하는 힘은 내가 기분 좋을 때 좋게 느껴지는 엄마와 기분 나쁠 때 느껴지는 엄마가 한 사람임을 깨달을 때 생긴다고 합니다. 이는 부모가 아이를 적절히 돌보는 환경, 즉 배가 고파 울면 먹을 것을 주고 기저귀가 젖어 울면 갈아주고, 아이의 울음에 반응하는 정서를 가진 보통의 양육환경에서 가능합니다.


처음에는 못 믿었지만, 반복되는 돌봄 속에서 아이는 양육자를 믿게 되고 자신을 믿게 되고 세상을 믿게 됩니다. 우울자리 역시 내가 악마라고 생각하고 파괴한 것이 사라질까 두렵지만, 나의 미움보다 사랑이 더 강하다는 믿음을 통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더 강하다는 믿음은 역시 양육자로부터 받았던 선한 돌봄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3)


이 영화는 미스터리 공포장르지만,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수준의 사건을 소재로 했기에 저는 재미있었습니다. 왜 다 큰 성인이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지, 현수의 수면장애는 치료되었는데 수진은 왜 아직도 굿을 하고 귀신을 쫓아야 한다고 하는지, 인간의 마음속은 정말 알쏭달쏭합니다. 100여 년 전 사람인 멜라니 클라인의 이론을 적용할 수 있다면, 인간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인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한 책

1. 홍강의,DSM-5에 준하여 새롭게 소아정신의학,학지사,2014,pp 364-368.

2. 박문호,그림으로 읽는 뇌과학의 모든 것,Humanist,2013,pp 597-611.

3. 최영민,대상관계이론을 중심으로 쉽게 쓴 정신분석이론,학지사,2010,pp 298-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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