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
지난 토요일, 이란 호르무즈 해협 인근의 타예베 초등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여학생 165명이 전쟁 폭격으로 사망했다. 학교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무너졌고, 아이들은 잔해에 깔려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사망자를 80명 정도로 추산했지만 결국 예측치의 두 배를 넘어섰다.
얼마 전 본 영화 <어톤먼트>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성폭행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던 로비는 2차 대전에 참전하게 되고, 퇴각하며 한없이 걷고 또 걷던 중이었다. 안개 낀 숲에는 교복을 입은 소녀들이 싸늘하게 포개져 있었다. 어린아이들의 떼죽음 앞에 로비는 오래전 브라이오니가 물에 빠졌던 날을 기억했다.
브라이오니는 로비를 짝사랑하지만, 로비는 언니 세실리아를 사랑한다. 로비에게 브라이오니는 어린아이였다. 브라이오니는 로비의 사랑을 시험하기 위해 깊은 물에 빠지고, 로비는 재빠르게 구하지만 화를 낸다.
'죽을 수도 있었어! 이게 재미있어?'
로비에게 어린 생명의 죽음은 공포와 분노 그 자체였다. 이란의 타예베 초등학교 폭격을 보며 나는 로비와 같은 생각에 잠긴다.
죽음과 소녀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파릇파릇하게 돋아나는 새싹 같은 아이들, 특히 소녀는 미래에 새 생명을 잉태할 수도 있는 여성이 아니던가. 현재에도, 미래에도 그들은 강한 생명력을 품은 존재다.
클림트와 더불어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화가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의 <죽음과 소녀>를 보자. 젊은 여인이 검은 옷을 입은 남자를 끌어안고 있다. 이 여인은 누굴까?
실레에게는 발리 노이질((Walburga Neuzil, 1894-1917)이라는 연인이 있었다. 실레의 모델이자 뮤즈였고, 가사를 돌보며 헌신한 조강지처 같은 여인이었다. 그러나 실레는 발리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이웃에 사는 에디트와 약혼했다. 화가에게 경제적 지원이 가능한 여유로운 집안의 딸이었다. 발리는 실레를 떠나고, 간호사로 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성홍열로 사망했다. 17세에 실레를 만났고, 스물셋에 죽었다.
'죽음과 소녀'는 르네상스 회화의 주제 중 하나였다. 흑사병을 비롯한 각종 감염병에 취약했던 시대 어울리는 주제다. 발리는 사망 당시 23세였으니 소녀는 아니었지만, 실레는 발리를 아직 피어나지 못한 애틋한 젊음으로 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실레는 발리를 전쟁터로 간접적으로 보낸 죽음의 사신인지도 모른다. 실레는 1915년에 이 그림을 그리고 소녀와 남자, 얽혀 있는 사람들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발리의 죽음을 전해듣고는 죽음과 소녀로 바꾸었다.
또 하나의 그림, <죽음과 소녀>가 있다. 오스트리아의 여성 화가 마리안 스톡스(Marianne Stokes, 1855–1927)의 작품이다. 호롱불을 들고 있는 저승사자 앞에 빨간 이불을 움켜쥔 소녀가 있다. 왜 나를 데려가냐고 따지는 것 같기도 하고, 눈물로 삶을 애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침대 옆에는 소녀처럼 아름다운 꽃이 놓여있다. 이제 막 피어나는 생명이다.
발리는 죽는 순간까지 저승사자 같은 실레를 끌어안고 싶었을지 몰라도, 타예베 초등학교의 소녀들이 죽음을 끌어안았을 리는 없다. 죽어 마땅한 사람은 없지만, 그중에서도 이제 막 삶을 시작한 어린아이들에게 죽음은 특히 어울리지 않는다. 마리안 스톡스의 그림처럼 소녀들은 울부짖었을 것이다.
165명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 2배, 3배를 곱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아이들의 부모와 형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165명의 죽음은 사실 더 많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쟁은 언제나 명분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따지고 보면 전쟁을 일으킨 이들의 사적인 이익일 뿐이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란 국민의 인권과 평화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명분은 이미 사라지고, 폭력을 위한 폭력만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지도자가 죽고, 민간인마저 공격당한 이란은 인접 국가의 민간인 시설을 공격하고 있다. 미국과 관련된 시설이니 어쩔 수 없다는 게 논리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 장소만 다를 뿐 끊이지 않는 전쟁의 참상 앞에 나는 몸살을 앓는다. 겨우 반 세기 전, 우리도 그렇게 폭격을 맞던 나라다. 나는 아이를 살리는 직업을 택했지만, 이제는 아이들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어른일 뿐이다. 그저 관심을 가지고 눈을 크게 뜨는 일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