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해 줘요

어쩌면 상실과 사랑은 동전의 양면

by sweet little kitty

Love me.

요즘 서현진 배우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의 제목이다. 언뜻 보면 골드 미스의 연애를 다룬 로맨스 드라마 같았다.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내가 이 드라마에 빠져든 이유는 가족 간병과 죽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https://youtu.be/Wh0kfL3Sc5U


2018년 12월,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엄마가 생신을 이틀 앞두고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화장터에서는 저렇게 뜨거운데 어떻게 엄마 시신을 넣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화장이 끝나자 이렇게 추운데 장지까지 어떻게 모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시신의 더위와 추위를 걱정할 만큼 나는 애틋한 딸이 아니었다.


극 중 준경(서현진 분)은 산부인과 의사고, 병원에서 일하다가 집에 두고 온 물건이 있어 엄마에게 퀵을 부탁했다. 7년 전의 일이었다. 준경의 엄마는 퀵이 비싸다며 직접 차를 몰고 병원으로 가다가 준경이 보는 앞에서 신호위반 트럭에 치이고, 두 다리를 잃게 된다. 준경의 죄책감과 오랜 투병으로 인한 엄마의 우울, 즐거움을 포기한 아버지의 희생, 같이 살지만 도움은 되지 않는 남동생의 철없는 연민이 모여 싸늘한 집안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 장면을 보다가 나는 오래전 그날을 떠올리게 되었다.


전공의 1년 차, 병원 건너편에 무언가를 사러 다녀오던 길에 엄마를 마주쳤다. 심부전 환자였던 엄마는 겁이 많아 운전도 못했고, 집에서 우리 병원까지는 차가 있어도 50분은 걸리는 거리였다. 내가 살던 원룸에 잠시 다녀간 엄마는 나에게 딱 걸린 것이다. 학생 때부터 자취를 했고, 굳이 와서 집청소나 요리를 해 줄 필요가 없는 나이인데도 아픈 몸으로 불쑥 나타난 엄마를 보고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 OO 보호자님이세요? 어머님이 지금 응급실에 오셨는데 심실 빈맥인 것 같아서 전기 충격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에 무서웠고, 나중엔 한숨이 나왔다. 다행히 엄마는 심실 빈맥이라는 심폐소생술에 직면한 부정맥은 아니었고, 원래부터 있었던 부정맥이 악화된 것이었다. 엄마는 낮부터 증상을 느꼈지만 먼 길을 다녀가느라 병원에 갈 시간을 놓친 것이었다. 나는 감히 1년차 주제에 근무하는 병원에 양해를 구하고, 택시를 타고 집 근처 대학병원으로 가서 다시 앰뷸런스를 타고 우리 병원으로 엄마를 모셔와야 했다.


이런 경우 딸에게는 죄책감과 억울함이 동시에 남는다. 러브 미의 준경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아직 젊은 나이에 집 안에 갇혀버린 준경의 엄마는 우울의 늪에 빠지고, 덩달아 간병의 늪에 빠진 아빠는 우울과 분노를 감추고 끝까지 좋은 남편과 아빠로 남는다. 엄마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남동생과 달리, 준경은 엄마를 증오한다.


"외로워지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어요."

친절한 옆집 남자의 말이 준경의 가슴에 깊이 꽂힌다. 우연한 자리에서 준경의 당돌한 모습을 본 옆집 남자 도현은 준경에게 매력을 느끼고 고백한다. 가족이 싫어 연애도, 결혼도 하기 싫은 준경은 엄마의 자살이라는 상실의 고통 앞에 사랑을 피하지 않는다.



간병이란 무엇이고, 애도란 또 무엇일까.

김애란의 최근 소설 <안녕이라 그랬어>는 간병이 어떤 식으로 사람을 갉아먹는지 현실적으로 들추어낸다. 은미는 7년 동안 엄마를 간병했고, 헤어진 연인 헌수도 누군가를 10년이나 간병했던 사람이었다. 간병은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고, 무엇보다 시간이 없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의 종착지는 인간관계가 끊어지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사랑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Love Hurts라는 팝송의 한 구절 'I'm young'을 '안녕'이라고 해석했던 은미는 이 단어에 인사말 외에 '편안히 잘 지내는 것'이라는 또 다른 의미가 있음을 깨닫는다.


아픈 사람에게 죄책감을 느꼈고, 자신을 희생해서 간병을 했고, 연민의 마음을 느꼈던 딸과 남편, 아들은 사실 그 어떤 순간에도 평안을 넘어 행복해질 권리가 있던 사람들이었다. 준경의 아빠는 그 권리를 너무 오래 억압했는지 아내의 장례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떠난 여행의 가이드를 사랑하게 되고, 죄책감과 분노를 동시에 느낀다.


내가 왜 행복해지면 안 되는데?

행복해져도 된다. 아니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그런데 나를 붙잡는 건 사실 나의 죄책감이다. 준경의 아빠는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와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펄펄 뛰며 자동차 사이드 미러까지 부수고 간 처제 앞에서 분노를 느끼고, 아내의 물건을 챙겨 쓰레기로 내놓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차 뒷좌석에서 발견한 아내의 수첩을 보고 오열하면서 다시 쓰레기 장으로 향한다. 애도를 해 본 사람이라면 안다. 행복하고 싶은 마음이 죄책감을 넘어서기까지는 너무 높은 장벽이 있는 것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한 달 후, 시아버님의 칠순이 있었다. 특별히 뭘 해야 한다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나는 사이판으로 시부모님과 가족여행을 건의했다. 10여 년만에 남편이 병원을 그만두고 휴식기간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행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알았다. 지금 여기에서 나만 슬프다는 사실을. 모두가 슬프면 화나지 않지만, 나만 슬프면 화가 난다. 막상 엄마 앞에서는 눈물도 흘리지 않았던 내가, 시부모님과의 여행에서는 누구도 나에게 뭐라 하지 않고 해야 할 일도 없었는데도 화가 났다. 화가 나서 또 슬펐다.


상실은 그렇게 아프고, 상실 이전에 묵혀 놓았던 모든 감정이 모두 올라오는 작업이다. 그렇지만 퀴블러 로스가 말했듯이 상실이라는 구멍에는 사랑을 담아둘 수 있다. 상실의 반대가 채움이라면, 그 채움에는 사랑이 빠질 수 없나 보다.


'당신이 평안하기를.'

'나를 사랑해 줘요'

안녕과 사랑, 새해 벽두부터 나 자신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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