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weet little kitty Aug 11. 2021

21세기 엄지 공주

키 작은 소녀에게 바치는 이야기

 아름답고 화려한 꽃들이 가득한 꽃마을, 어느 가정에서 여자 아이가 태어났어요. 아이의 이름은 엄지, 체구가 유난히 자그마해서 붙여진 이름이었지만 엄지는 누구보다 총명하고 예뻤습니다.


 엄지의 엄마, 아빠는 체구가 자그마하여 누구보다 키가 큰 아이를 낳기를 원했지만, 엄지가 유난히 더디게 키가 크자 병원에 데려갔습니다.

 " 선생님, 엄지는 왜 이리 키가 크질 않나요? "

  " 음, 이 아이는 또래에 비해 체구가 유난히 작습니다. 큰 문제는 아닐 수 있지만 검사를 해 봅시다."

의사 선생님은 엄지가 먹는 양에 비해 키와 체중이 잘 늘지 않으므로 몇 가지 검사를 권했습니다. 1주일이 지나고, 병원에서 선생님과 마주한 엄마는 달갑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 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달라서, 비교적 건강하지만 성인이 되어도 키가 많이 작을 것입니다. 그 사이에 영양 및 건강상태를 주기적으로 관찰하고, 성장 호르몬 주사를 맞도록 합시다."


 엄지의 엄마는 누구보다 엄지가 키가 크기를 바랐으나,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서글퍼졌습니다. 키가 작으면 뭐든지 불리했던 자신의 과거가 서글퍼서 엉엉 울었습니다.

 " 키가 크면 좋을 텐데. 학교에 가서도, 친구를 사귈 때에도, 취직할 때도, 결혼할 때도...

  키가 작으면 늘 무시당하거나 불이익이 있을까 봐 힘들었는데...."

           

 엄지는 키가 작은 것보다도 엄마가 그런 자신을 서글퍼한다는 것이 너무 슬펐습니다. 엄지는 아무도 모르게 밤에 혼자 달을 보며 울었습니다.

" 달님, 왜 저는 키가 작게 태어난 걸까요? 저는 우리 엄마가 많이 웃고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엄마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사랑받을 수 있을 텐데...... 제 인생은 시작부터가 눈물이네요."

       

엄지는 말을 시작할 무렵부터 키가 크는 호르몬 주사를 맞았어요. 10살 정도 된 아이들도 물론 키가 크기 위해 주사를 많이 맞는 시절이었지만, 엄지는 조금 더 일찍 시작한 셈이지요. 하지만 왜 아프고 귀찮은 주사를 매일 맞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저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 키가 크기 위해 아픈 것도 꾹 참고 열심히 주사를 맞았어요.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엄지는 나이를 먹고 주사도 맞았지만 키는 기대한 만큼 크지 않았어요. 엄지는 결심했어요.


"분명 내가 작은 건 이유가 있을 거야. 내가 작은 키 그대로 꼭 해낼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내가 직접 찾아볼 거야."

엄지는 오랜 시간 달빛 아래 눈물로 채워 갔던 그 방에서 벗어나 꽃마을 너머의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났어요. 두렵고 불안했지만 용기를 내어 지평선 근처로 하염없이 걸어갔어요.

 

 꽃마을 너머에는 오래된 선인장 나무가 보살피는 숲마을이 있었어요. 그곳에는 화려하진 않지만 늘 한결같은 나무들이 가득했고, 시원한 그늘이 많이 있어서 쉴 곳도 충분했어요.

 "선인장 나무님, 저는 꽃마을에서 온 엄지라고 해요. 안녕하세요?"

 " 안녕, 얘야. 아니 엄지야, 참 예쁜 이름이구나. 무슨 일로 여기까지 먼 길을 달려왔니?"

" 저는 제가 사는 곳에서 행복하지 않아요. 어떻게 해야 키가 커질 수 있을지 오랜 시간 고민했지만, 방법을 찾지 못했어요. 많이 먹어도, 주사를 맞아도, 운동을 해도 제가 원하는 만큼 키가 크지 않아요."

" 주사를 맞는다고? 키가 크려고?"

" 네, 제가 있는 꽃마을에선 그래요. 키가 크고 화려해야 주목받거든요. 저희 엄마는 제가 키가 크기를 간절히 원했는데 저는 작게 태어났어요. 왜 그럴까요?"

" 엄지야, 마음이 아프구나. 우리 나무 마을에도 키가 작은 나무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단다. 관목은 키는 작아도 옆으로 가지를 많이 쳐서 풍성해지는 걸. 참, 우리 마을에서 뭘 하고 싶니?"

" 제가 키가 작은 만큼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아서, 그게 무언지 찾아보고 싶었어요. 제 작은 키가 누군가에게 큰 의미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어요."

' 흐음, 아이답지 않게 깊은 울림을 주는 말이구나. 나는 여기서 오랫동안 숲을 돌보았지만 너처럼 나에게 울림을 주는 이는 없었던 것 같구나. 오랜 시간 많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마침, 여기 숲에서 함께 살아가는 생물들 중에 나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들을 살펴보고, 어려움은 없는지 찾아보려고 한단다. 작은 생물들을 관찰하려면 눈높이가 맞아야 하는데, 혹시 네가 해 줄 수 있겠니?"

"그럼요. 제 키라면 충분히 관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맡겨주시면 열심히 해 볼게요."

"고맙구나. 낮 시간에는 특별히 위험할 일은 없을 거야.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렴."


 

엄지는 축축하고 미끄러운 땅을 밟으면서 숲마을을 관찰하기 시작했어요. 아주 작은 나무 모양의 우산이끼들이 가득한 곳이었어요. 갈라진 우산 모양과 펼쳐진 우산 모양의 미끌미끌한 이끼들이 가득했어요.

" 가까이에서 보면 하나하나 모양이 있구나. 이끼는 밭처럼 펼쳐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안녕, 이끼들아! 나는 꽃마을에서 온 엄지야."

" 안녕. 직접 얼굴을 보고 인사한 건 네가 처음인 것 같아. 우리를 밟지 않고 바라봐 준 사람은 네가 처음인걸. 반가워. 우린 우산이끼야."

" 오 그렇구나. 나도 영광인 걸. 선인장 나무님이 숲마을의 낮은 곳을 살펴보라고 부탁하셔서 왔어. 너희들은 뭐 힘든 점은 없니?"

" 응, 우린 그늘지고 습한 돌 틈이나 나무 그늘 주변에 살아. 요즘 우리 주변에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를 사람들이 베어가려고 해서 걱정이야. 우린 햇빛이 들면 못 살거든."

"그렇구나, 나무를 왜 베려 한대?"

" 응, 정확히 설명해 주진 않았지만 걸리적거린다고 그럴 때도 있고, 새로 길을 낼 때도 있어. 여긴 숲에서 나가는 출구 쪽이라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에 가까이 있거든. 휴... 제발 나무는 건드리지 말았으면 좋겠어."

" 그렇구나. 내가 선인장 나무님께 전해드릴게.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 고마워. 참 다정한 아이구나. 너랑 눈 맞추고 이야기할 수 있어서 참 좋았어. 조심해서 가."


엄지는 계속 걸어갔어요. 그러자 나뭇잎을 사각사각 갉아먹고 있는 쥐며느리를 만났습니다.

" 안녕, 얘들아. 난 엄지라고 해. 꽃마을에서 왔어."

" 안녕, 난 쥐며느리야. 낙엽이나 돌 밑에 살고 있는데 사람들이 우릴 징그럽다고 할 때가 많아. 넌 내 모습이 징그럽지 않니?"

"글쎄, 마디마디가 나뉘어 있고 다리가 많아서 그렇게들 느꼈나 보다. 가까이에서 보니 나름대로 귀여워.

그런데 사람들이 널 그렇게 보면 속상했겠다."

" 응, 맞아. 난 크게 피해 주는 것도 없는데 말이야."

엄지는 자신의 작은 키를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던 시선이 떠올랐어요.


'그들도 나를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했을까? 꽃마을에선 숲마을 나무만큼 키가 큰 식물도 많지 않았는데도 난 참 작아 보였는데, 여긴 나보다 훨씬 큰 나무들과 나보다 더 작은 생물들이 같이 살아가고 있구나....'

"쥐며느리야, 예전엔 너를 마주칠 일이 별로 없어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사실 난 선인장 나무님의 부탁으로 숲마을을 둘러보고 있어. 작은 생물들에게 힘든 일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하셨거든. 내가 돌아가면 선인장 나무님께 네 이야기를 전해드릴게. 혹시라도 도와줄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엄지는 쥐며느리를 뒤로 하고 계속 걸어 나갔어요. 축축하고 미끄러운 지렁이도 보았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개미도 만났어요. 바위틈에서 조용히 쉬고 있는 달팽이도 보았지요.


'모두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구나. 꽃마을에 있을 땐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들을 많이 보아서 그런지 여긴 낯설고도 신기하네. 무엇보다 나보다 훨씬 큰 이와 더 작은 이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놀라워. 서로를 존중해 주는 것 같아."



엄지는 개울가에서 잠시 목을 축였어요. 어느덧 작은 생물들이 살아가는 마을을 다 지나온 모양이에요. 흐르는 물에 땀을 씻으며 생각했어요.

"여기 오길 잘했다. 나는 작은 사람이지만 보다 넓은 곳까지 와 보았고, 보다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 나의 눈높이는 낮은 곳에 있는 작은 이들에게 맞추어 줄 수 있는 재능이었어. 작고 소외된 것들에 대한 관심 역시 나의 장점이었어. 모든 것은 내가 작은 아이였기에 가능했구나."


엄지는 선인장 나무에게 돌아가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생각했어요.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용기도 생겼지요. 엄지는 작고 어리지만 그 누구보다 큰 사람처럼 보였어요. 선인장 나무에게로 향하는 엄지의 발걸음은 가볍지만 웅장했거든요. 마치 하룻밤 사이 소녀가 큰 꿈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한 것처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