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weet little kitty Aug 21. 2021

<일간 이슬아>를 읽는 시간

-TV 소음과 집안일이 없는 시간 속에서 살아갈 지혜를 얻는다.

나는 이슬아 작가를 좋아한다. 신문기사를 통해 <일간 이슬아>의 존재를 안 지는 1년이 채 안 되었지만, 그 사이 그녀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니 계속 다음 책을 빌리게 되고, 구매하게 된다. 단연 훌륭한 작가이기도 하지만 독특함으로 표현되는 개성, 타인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는 자신감, 지금의 화려한 모습 뒤에 숨겨진 고생스러운 시간들, 주류보다는 마이너리티에 대한 그녀의 관심도에 반해 버렸다. 독특한 작가보다는 무난한 작가 위주로 책을 고르던 나로서는 참으로 큰 변화이다.


 초창기 글을 모아 책으로 만든 <일간 이슬아>를 도서관에서 책으로 빌려왔을 땐 방대한 분량에 막막했다. 참 재미있고 좋은 글이 많았지만 한편으론 매일 메일로 받아보는 한 편의 글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그리하여 지금은 휴재 중인 일간 이슬아의 최근 과월호를 신청했다. 언제든 신청하면 가장 가까운 토요일에 한 달 치를 이메일로 보내주는 130여 쪽의 pdf 파일이다. 이걸 매일 밤 한 편씩 받아본다면 정말 설레겠구나. 보내는 쪽에서야 단체 메일이겠지만 받는 쪽에선 연애편지 받는 것 마냥 특별한 느낌일 것 같다.


 비 오는 토요일 아침, 나는 문학 동네의 북카페 꼼마에 앉아 <일간 이슬아>를 읽는다. 집안일을 하며 방학 내 아이들이 틀어놓은 유튜브 소리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일상 속에서 꿈꿔온 시간. 내게 <일간 이슬아>를 읽는다는 것은 바람직한 사치임을 느낀다. 종이책은 펼쳐놓고 다른 일을 하다가 와서 또 보고, 외출할 때 들고 나가서 짬 날 때마다 볼 수 있지만 <일간 이슬아>의 pdf 파일은 휴대폰으로 보기엔 눈이 아프고, 노트북을 켜고 자리에 앉아야 제대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따로 시간과 공간을 내어, 노트북을 방전시키지 않으려 시간을 이어 붙여 글을 읽고 있다.


 글 한 편에 500원 남짓 되는 원고료이지만, 출판사를 통하지 않고 독자와 직거래를 하는 방식은 이슬아 작가만의 독특한 아이디어였다. 초창기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최근 작품들은 매주 금요일 친한 작가의 글을 소개도 하고, 한 달의 마지막 편에는 그녀의 음성으로 직접 부른 노래를 글 대신 전송하기도 한다. 그저 작가 자체가 예술인 거다.


 전자책을 즐겨 읽지 않는 나지만, <일간 이슬아>는 정말 읽을 맛이 난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그 삶을 들여다본다. 자유로운 영혼이지만 단단함이 있고, 불확실성의 시간을 잘 버텼으며, 틀에 들어가지 않는 자유로움과 동시에 세상을 향한 날카로운 통찰이 있다. 역시 모든 예술은 테크닉보다 콘텐츠이고, 거기에는 세상을 보는 안목, 즉 통찰이 필요한가 보다.



 

언제부터인가 틀에 잘 들어가지 않는 내 아이들에 대해 고민하며 아이와 비슷한 성향을 지녔다고 판단되는 예술가들의 삶에 관심이 많아졌다. 이 모든 것이 커서 예술가가 되기 위한 큰 그림일지 모른다며 위안 삼고 싶었다. 물론 이 발상은 아이를 가르쳐 주는 미술, 플루트 선생님들이 내적 갈등이 많고 예민한 아이들의 성향을 긍정적으로 봐주셨던 점에서 출발했다. 아이에게 내적 갈등이 많다는 것은 부모로서 힘든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빠듯한 계획표를 짜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문화에서 살고 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해야 하고, 시간을 여유 있게 쓰기보다는 꽉 채워서 가능한 많이 배우는 것이 좋다고들 한다. 이러한 양육 방식은 부모가 열심히 뛴 만큼 아이도 따라주어야 효과를 본다. 학원에 가라면 가고,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영어 수학은 기본이고 국어는 독후활동이나 논술 수업, 여기에 예체능도 저학년 때는 필수이다. 모든 교육의 최종 목표는 학교 평가에서 점수를 잘 받는 것으로 귀결된다.


 혼자 놀기 위해, 딱히 정해지지 않은 방식으로 타인과 놀기 위해, 책을 읽기 위해, 쉬기 위해 아이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비워주려는 나의 양육 방식은 대개의 타인들이 보기에 바람직하지 않다. 나 역시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아이의 성향 때문에 귀찮아서 사교육을 최소화하는 것인지, 정말로 아이의 시간과 마음을 비워주는 것인지 늘 고민하고 성찰한다.



 어릴 적 나는 한시바삐 집에서 나가는 아이였다. 무엇이든 해야 했다. 비록 첫째였지만 장손이라 불리는 남동생으로 둔 나로서는, 본능적으로 존재만으로 사랑받을 수 없음을 직감했던 것 같다. 이런 내게 사교육이란 부모님의 사랑을 확보할 수 있는 무기였다. 옆의 친구가 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배우겠다고 했다.


 여섯 살 때부터 시작한 피아노는 학원 수업 시간 외에도 연습을 위해 그곳에 오래 머무르게 했고, 전공할 생각도 없으면서 초등 6학년 때까지 7년간 레슨이 지속되었다. 초등 2학년부터 시작한 미술도 그림이 좋아서라기 보단 점수를 잘 받고 싶었던 과목이었다.


속셈학원이라 불렸던 우리 때 수학학원도 등교하기 한 시간 전 일어나서 다녀왔던 생각을 하면 초등 고학년이라 해도 쉽지 않은 일과였던 게 맞다. 7시 50분쯤 아래층 베이커리의 빵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가벼운 통증이 빈 속을 함께 찌르던 어둑어둑한 아침을 기억한다.


이후에도 수영, 한자, 영어... 엄마의 픽업은 커녕 혼자 알아서 걸어 다녀야 함에도 나는 방향성과 목적 없이 그 모든 것을 다 배우고 잘하고 싶었다. 그리 뛰어나진 못했지만 나보다 잘하는 아이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성과가 어땠건 간에 내가 애정과 인정에 목마른 아이였다는 것을, 나는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이제 나는 우리 아이들이 왜 그리 말이 많고 무엇 하나 시키는 대로 조용히 하지 않는지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내가 부지런히 살아온 그 삶이 어른들이 보기에는 바람직한 삶이지만, 내 유전자에게는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일단 이런 식의 학습은 내적인 동기가 결핍된 공부이기에 오래가지 못한다. 결과 지향적이기 때문에 좌절이 오면 쉽게 일어서지 못하는 것도 맞다. 무엇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지 않다. 1980년 생인 나는 그런 방식으로 공부를 하고 사회에 나와 살아갈 수 있었지만, 밀레니얼 세대인 우리 아이들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지식을 효율적으로 흡수하는 것 이상으로 내면을 단단히 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평생 공부해야 하는 시대이므로 공부에 너무 일찍 질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 엄마는 너보다 힘든 환경에서도 열심히 배우고 공부했는데, 너희는 뭐가 부족해서 이렇게 게으르고 말이 많니?'라는 마지막 뒤끝이 내 마음속에서 지워질 때까지, 나는 책을 읽고 동시대의 예술가들을 관찰하며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시대와 내 유전자의 가장 바람직한 변형에 대해 고민한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인문학 공부이고 나의 성장인 동시에 양육을 위한 밑천임을 깨닫는다.


이슬아 작가는 그 한가운데 위치한 고마운 분이다. 딸이 살아가는 방식을 세상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고, 때론 자식의 어떤 면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 줄 수 있는 친구 같은 어머니 '복희 씨' 역시 나에게는 좋은 스승이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카페에서도, 옆 자리의 젊은 두 여자분들의 대화 속에는 '서울대'와

'어쭙잖은 점수' 등의 단어가 끊임없이 거론되고 있다. 대화의 팔 할이 교육이고 교육의 목표는 경쟁과 점수, 그리고 등수. 나는 과연 거기에서 자유로운 엄마일까? 겨우겨우 버텨내는 엄마일까?)



              < 복고 느낌의 사진과 더불어 각 문장의 배열, 폰트, 색깔이 전부 다른 점에서, 글에 담길

                자유로움과 신선함, 그리고 약간의 엉뚱함을 예고하는 듯하다.>

                - 출처: 일간 이슬아 2018년 3월호 표지 /이슬아 홈페이지

이전 07화 외향성과 내향성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