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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 little kitty Aug 09. 2022

탑 쌓기와 장애물 넘기

아파트 누수로 우울한 나를 위로하는 방법

 밤사이 머리가 빠지는 꿈을 꾸었다. 원래도 머리숱이 풍성하진 않지만, 꿈에선 병적인 탈모가 진행되어 두피에 주사를 맞는 내용이 그려졌다. 끔찍한 꿈이었다. 주사는 아팠고, 내 몰골은 흉측했다.


아침 10시, 아파트 인터폰을 통해 아랫집에서 전화가 온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처음 있는 일이다. 이사 와서 제대로 인사도 못 했는데, 아침부터 인터폰이라니.


"안녕하세요? 아랫집인데요. 혹시 관리실 전화받으셨어요?"

"아니요. 무슨 일이세요?"

"저희 집 부엌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어요."

"......."


관리에서 그제야 전화가 온다. 도구를 든 직원 분이 방문했다. 싱크대 밑은 물이 고여 있지는 않았으나 약간의 습기가 있었고, 수도를 틀자 수전 라인에서 물이 줄줄 새서 바닥으로 흘러갔다. 난 이걸 왜, 몰랐을까.

"누수 부위를 찾았으니 이제 저희는 할 일을 다 했습니다. 사설 업체를 불러서 해결하시면 됩니다."


이 집은 9년 전에도 부엌 싱크대에서 누수가 있었다. 그때도 내가 살 때였다. 나는 새벽 6시 반에 출근해서 저녁 7시 반에 집에 오는 사람이었다. 실거주자면서 문제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대신 모든 것은 부모님이 하셨다. 어차피 이 집은 부모님 소유였고, 살던 집이 팔리지 않아서 이사오지 못하고 나에게 월세를 주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관리소 직원들과 사설업체의 방문에도 누수 위치는 알았으나 확한 원인은 찾지 못했다. 입주하고 처음 사람이 들어온 집인데, 정작 주인은 살아보지도 못한 집인데 누수라니. 엄마는 집을 잘못 분양받았다고 한숨을 쉬었다. 아빠는 평소엔 조용하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벌컥 화부터 내는 성격이었다. 아빠와 아랫집 주인이 행여 다툴까 엄마는 마음을 졸였다. 빠른 해결을 원한 아랫집 사람들 예고 없이 우리 집에 찾아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차로 40분 거리에 살았지만 손녀딸을 보러 내가 없는 낮 시간에도 종종 방문하곤 했는데, 마침 아랫집 사람들이 찾아왔던 거였다.


엄마의 한숨 섞인 목소리와 하소연은 일만 하던 나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아랫집 사람들은 더 많은 보상을 원했으나 관리실의 중재로 도배비 정도를 물어주고 일은 끝났다.  다행이었다. 더 이상 엄마의 불안과 아빠의 짜증을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시고, 나는 9년 만에 같은 집으로 다시 이사를 왔다. 지난 2년 동안 세입자가 살았지만 누수는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테리어 업체에 9년 전 누수가 있었음을 설명하고 특별히 배관에 신경 써 줄 것을 당부했다. 공사가 끝난지는 이미 8개월째, 여기 산지는 6개월 째인데 공사 하자로 지금에야 누수가 발견되었을까?


"혹시, 최근에 아파트 정화조 청소 같은 게 있었나요?"

"1주일 전에 온수 관련 정비가 있었어요. 9시부터 6시까지 온수가 나오지 않았어요."

"압력이 줄었다가 갑자기 세게 들어오면서, 수전 연결 부위에 충격을 주었을 수 있어요. 또 보통 탱크 청소 업체에서 찌꺼기랑 녹을 제대로 제거하고 처리해야 하는데, 적당히 하고 세대로 흘려보내는 경우가 있어요. 정비 후 먼저 물을 튼 세대로 흘러 들어갑니다. 수전을 교체할 때 뜯어보면 확인할 수 있겠지만, 관리 사무소에 얘기하셔야 할 것 같아요. 저희 쪽 과실은 아니에요."


이유야 어쨌든 나는 우리 집 누수 부위를 수리해야 하고, 아랫집 천정을 고쳐주어야 한다. 인테리어 업체는 관리소 탓을 하고, 관리소는 나 몰라라 한다. 보험회사는 인테리어를 한 지 1년이 안 되었으므로, 업체 과실을 들어 보상 받으라고 한다. 마치 의료사고 과실 입증 같다. 나에게 결정적 증거가 없으면, 모든 비용은 내 몫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 집 싱크대 수전을 똑같은 것으로 교체해야 하는데(해체를 위한 나사도 새 제품에 들어있다고 한다), 구하려면 2박 3일이 예상된다는 소식을 듣는다. 인테리어 할 때 길쭉하고 날렵한 수전을 고른 것이 문제였다. 그냥 평범한 것으로 고를 걸.


 하루 종일 싱크대도 못 쓰고, 이 사람 저 사람 방문하며 외출도 못했다. 관리사무소, 인테리어 업체, 보험 회사. 여기저기 전화하느라 바쁘다. 문득, 어제 꾼 꿈의 해몽을 찾아본다.


머리가 빠지는 꿈

생각하지 못했던 난관이나 일이 생겨 스트레스받는 꿈으로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출처] 백발 되는 꿈 탈모 생기는 꿈 머리카락 뽑는 꿈|작성자 마리앙


삶은 높이 탑을 쌓는 경기라고 생각했다. 다 쌓으면 높이를 비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부모님은 자산증식과 자녀교육이라는 탑 앞에 모든 체력과 정신력을 소진했다. 열심히 사신 인생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몸은 약하고 마음은 여렸다. 탑을 쌓느라 건강을 돌보지 못했다.


나 역시 탑을 쌓는데 집중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탑을 쌓지 못해 금단 증상이 생길 지경이다. 이런 내가 오늘의 누수 사건을 보며 떠올린 경기는 <장애물 넘기>였다. 삶이 끊임없는 문제 해결 과정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나는 탑은 못 쌓아도 그럭저럭 잘하고 있는 셈이다.


<2011 육상> 여자 3000m 장애물 경기 (naver.com)

아랫집 새 주인은 9년 전 누수 사건을 전주인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어젯밤에 누수를 발견했지만 침착하게 연락했다. 우리 집으로 올라오지 않는다. 나는 '2주 정도 천정을 말린 후, 누수가 없으면 내 인테리어 업체를 통해 도배를 다시 하면 된다.'고 차분하게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생각해 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한다. 나는 다투지 않고, 수리 비용 때문에 과도하게 속 끓이지 않는다. 이래저래 억울하지만, 그래도 건강을 잃지 않도록 스스로를 챙길 것이다.


9년 전, 누수 사건으로 과도하게 속을 끓이며 비용이 많이 나올까 전전긍긍하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는 누수 사건에 아무런 죄가 없었다. 그런데도 죄인 같았다. 그렇게 살면 원래도 약한 사람은 더욱 아프게 된다. 앓느라 현재를 즐길 수가 없다. 스트레스 받는다고 결과가 달라지지도 않는데 말이다.




 만 5세 취학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보육보다 교육을 시키는 것이 훨씬 쉽다. 공교육은 무상보육보다 비용도 적게 들 것이다. 최종 목표가 입시인 우리의 교육은 탑쌓기에 가깝지만, 보육은 어떻게 해도 장애물 넘기에 가깝다. 평가를 목표로 하는 학습은 학생과의 상호작용보다 일방적 가르침이 효율적이다. 하지만 보육은 무작정 일방으로 할 수 없다.

나는 지금 아이들에게 교육보다 보육을 더 많이 제공하고 있다. 특히 방학에는 더욱 그렇다. 그런 나의 삶은 다람쥐 쳇바퀴 같다. 탑을 하나도 쌓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일도 아이들과 고양이와 또 그렇게 청소를 하고, 밥을 짓고, 보드게임을 하고, 책을 읽는 장애물 넘기를 계속할 것이다. 속상한 일이 있어도 건강을 잃지 않도록 잘 먹고 운동도 할 것이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도 적당히 찌푸렸다 웃으면서 해결해 갈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의 시간을 충분히 보내고 싶기 때문이다. 만약 바꿀 수 있다면 나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집 대신 부모님의 건강과 시간을 갖고 싶다. 사람에게는 그런 선택권이 없다. 돈으로 시간과 건강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서글픈 진리를 나는 40대에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탑을 쌓는 것을 잠시 중단하고 장애물을 넘는다. 평지의 경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다람쥐 쳇바퀴와 평지의 장애물 경기에 좌절감을 느끼면서도 말이다. 나는 위로 올라가는 대신, 사랑하는 사람과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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