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방학을 맞이하여 가족 단체 병원투어를 진행했다. 정기검진 차원에서 치과와 안과 투어를 다녀왔는데 병원이 위치해 있는 곳은 주차장이 협소하고 골목이 많은 동네였다. 남편은 나와 아이들을 먼저 내려주고 주차할 곳을 찾아 헤매다가 CCTV 단속 카메라가 없는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 올라왔다. 차 댈 곳 찾기가 어려웠을 텐데 빨리 주차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문제는 주차 단속을 CCTV로만 하는 줄 알았다는 점이다. 주자단속 요원이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주정차 위반 딱지를 발급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병원진료를 마치고 차에 돌아와 보니 차 앞 유리에 주정차 위반 단속 벌금고지서가 반갑게 우리를 보며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광고 전단지인 줄 알고 뽑아 버리려 했는데, 알고 보니 차량 번호가 정확하게 적힌 벌금고지서였다.
두둥!!
두 아들 녀석은 엄마를 보며 동공에 지진을 일으켰다.
아빠가 어떤 사람이던가! 스크루지 영감도 친구 하자고 할 위인이 아니던가. 뼛속까지 아빠 성격을 잘 아는 아이들은 앞으로 펼쳐질 험악한 분위기를 예상하고 걱정한다.
아빠는 돈을 허투루 쓰는 것을 가장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는 사람이라는 걸 자식들이 더 잘 안다. 그동안 아빠의 분노를 경험한 경험치가 있기에 아이들은 곧 일어난 폭풍에 미리 비상경보를 내리며 마음의 준비를 하며 걱정하고 있다. 심지어 병원에서 대기시간이 길어지며 굉장히 짜증 난 상태였으므로 불 보듯 뻔한 일이 벌어질 것임을 아이들은 직감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빠가 늦은 점심 해결을 위해 간식을 사러 나간 사이 아들과 엄마가 먼저 범칙금 고지서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이 순간 결심한다. 가족의 평화와 정신적 평안을 위해 범칙금 고지서는 숨기기로.
아이들은 아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찝찝했든지 엄마에게 그래도 되냐며 반문한다.
걱정 마, 엄마가 몰래 벌금 내면 돼. 아빠는 모르는 게 낫지 않겠어? 화낸다고 벌금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다. 아빠만 모르는 우리들만의 비밀이 생기는 순간이다. 이렇게 선의의 거짓말은 시작되었고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는 순간이었다.
멀리 아빠가 햄버거를 사서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얼른 벌금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아무 일 없는 듯, 추우니 빨리 차 문을 열어달라고 말하며 그 상황을 벗어났다. 차 안에서도 아들과 엄마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이 상황을 모르는 아빠를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로 바라봤다.
벌금은 안 낼 수 없는 상황이니 돈만 손해 보면 되었지 집으로 돌아오는 1시간이 넘는 시간을 가족 모두 가시방석에 앉아 있게 할 수 없었으므로 엄마가 현명한 판단을 했다고 생각한다. 분노에 찬 정신상태로 운전하면 더 위험하지 않겠는가.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고 아는 것이 도리어 근심이 될 때가 있다. 모르는 게 약이니 아빠는 이날 범칙금 고지서를 발견하지 않아 허투루 돈을 썼다고 그곳에 주차한 자신을 자책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들은 아빠의 분노를 마주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고, 엄마는 조용하고 평화롭게 귀가할 수 있었서 좋았다.
며칠이 지나 아빠가 집을 비운 사이 구겨서 주머니에 넣어놨던 고지서를 펴서 찬찬히 읽고 고지서에 적힌 곳으로 전화했다. 보통 우편으로 고지서가 날아오던데 주차요원이 발급한 인편 범칙금 고지서는 납부 방식이 달랐다. 전화해서 주차한 시간과 차량을 확인하고 전화번호를 알려주니 핸드폰 문자로 벌금 납부 계좌를 보내주었다.
자진 납부라 20% 할인을 해준다고 한다. 그래서 4만 원 딱지를 32,000원에 납부했다. 통닭 2마리 값을 관악구청에 기부했다
아직도 아빠는 모르는 비밀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벌금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의미 있게 쓰일 것이라 위로하며 교통법규를 잘 지켜서 손해보지 않으리라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