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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흥미진진한 독자 Nov 13. 2023

자린고비 남편의 인생최대위기 - 범칙금고지서

남편이 퇴근하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종이 한 장을 들고 들어온다. 얼굴에는 분노와 억울한 감정이 뒤섞여 있다. 식탁에 앉더니 들고 온 누런 종이를 펼쳐 놓고 씩씩거리며 째려보고 있다. 그 종이는 바로 경찰서장님이 친절하게 집으로 직접 보내주신 과태료부과 사전통지서였다.


남편은 평소 차선 변경을 자주 하며 운전하는 습관이 있다. 옛날에 실선에서 차선 변경을 하다가 뒤차의 블랙박스 영상 신고로 과태료를 낸 적이 있다. 실선과 점선을 명확하게 구분하며 운전하지 않았던 둘 모두에게 경각심을 가지게 한 벌금이었다. 그때 이후로 실선에서는 절대 차선을 바꾸지 않는다.

이번에는 또 어떤 일로 신고를 당한 것일까? 남편이 너무 씩씩대며 열받아 있어서 모른척하고 다음 날 고지서를 보니 남편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내용이었다.


짧은 신호를 받으며 움직이는 2차선은 항상 줄이 길다. 1차선은 차가 없으므로 남편 본인은 융통성을 발휘한다는 생각으로 1차로에서 우회전을 한 것이다. 2차로에서 계속 서 있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이 동네 사람들이 자주 이렇게 도로를 이용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한 행동이 위반 사실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영상이라는 객관적 증거가 있기 때문에 없던 사실이 될 수 없었다.

남편은 생돈을 벌금으로 내야 한다는 사실에 속이 부글부글한다. 쓸데없이 부지런한 신고자, 좀 봐줘도 될 텐데 굳이 신고했다며 세상인심 야박하다고 투덜댄다. 그렇게 한참을 고지서만 바라보며 쉽게 범칙금을 내지 못하고 있다. 뒤 페이지 안내 사항도 한동안 계속 읽고 있다.


혼자 궁시렁대며 말한다.

"독서실에서 게임하며 전기료 아끼면 뭐 하냐고. 벌금으로 한 방에 4만 원 냈는데!" 하며 공든 탑이 무너진 허무함을 쉬이 삭이지 못하고 저녁 내내 한숨이다.

"요즘 세금도 부족하다고 난리인데, 나라 살림에 보태줬다고 생각하고 잊어."라고 살짝 약을 올리듯 말했다. 이미 엎어진 물인데 열받아 봤자 어쩌겠는가.

앞으로 남편은 차선을 잘 지키며 운전하는 모범운전자로 거듭 태어날 것이다. 자린고비에게 범칙금은 호환 마마 전쟁만큼 무서운 존재다.

하루가 더 지났는데도 4만 원만 생각하면 짜증이 나는지 또 벌금 이야기를 한다. 벌금은 4만 원 냈는데 스트레스는 400만 원어치를 받고 있다. 이럴 땐 빨리 잊는 게 상책인데 미련한 남편이다.

'기억해 내는 힘이 아닌 잊는 힘이야말로 살아가는 데 더 중요하다'라는 명언이 지금 남편에게 필요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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