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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주 Aug 18. 2021

아이들도 하면서 산다

우리도 자경문


율곡은 열세 살에 첫 장원급제 한 이후에도 아홉 번 연속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구도 장원’으로도 불렸다. 어머니를 여의고 방황하던 시기에 지었던 자경문은 ‘스스로 경계하는 글’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이정표를 정립하고 그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 구체적인 방법을 세워 좌우명으로 삼았던 글이다. 스무 살 나이에 이런 엄격한 표지를 세운 걸 보면 위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요즘 세대와 조상 세대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나 보다. 스무 살의 위엄이 자못 무겁다.     




1. 입지 : 성인을 본보기로 삼고 큰 뜻을 품을 것

2. 과언 : 말을 줄여 마음을 안정시킬 것

3. 정심 : 잡념과 망상을 없애고 마음을 고요하게 할 것

4. 근독 : 항상 경계하고 삼가는 마음을 가질 것

5. 독서 : 시비와 실천을 위해 글을 읽을 것

6. 소재욕심 : 재물과 영화에 대한 욕심을 없앨 것

7. 진성 : 할 일은 정성을 다하고, 안 할 일은 끊어 버릴 것

8. 정의지심 : 사소한 불의나 희생이라도 소홀히 하지 말 것

9. 감화 : 타인을 감화시키지 못하는 것은 나의 성의가 부족하다 여길 것

10. 수면 : 병이 있거나 밤에 잠을 잘 때 아니면 함부로 눕지 말 것

11. 용공지효 : 공부는 늦추어서도 성급해서도 안 되고 평생 꾸준히 할 것     




역사 공부를 함께 하는 아이들과 율곡 이이를 주제로 공부하다 찾아본 자경문이다. 마침 방학 들어가던 주간이라 주제 수업 마친  각자 자경문을 써보는 것으로 수업 활동을 대신하기로 했다. 율곡 이이가 스무 살에 지은 글을 참고로 하되 우리는 아직 학생이고 세대가 다르니 각자에게 맞춤할 항목을 생각해보자고 권했다. 나만 생각지 말고, 방학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해 가족들과 어찌 화목하게 지낼 것인지를 중심에 두고 써보자 제안도 있었다.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도  가정을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되니 자고로 우리가 품은 뜻이 적지 않음을 상기시켰다.     


멋스러운 한지에 옛체로 <자경문>이라  종이를 준비했다. 한껏 기분에 취해 마음을 모아 써보자는 최소한의 장치다. 흰색 A4용지가 익숙한 아이들은 한지 재질을 손으로 만지고 필기도구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생각을 모은다. 항목을 정해서 실천 강령을 정하는 것이니 문장보다는 생각에 집중해야 한다고 일렀다. 선뜻 시작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아이들 시선이 느껴져 선생이 먼저 쓰기 시작한다. 함께  쓰는 선생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된다. 수업 분위기도 단연 좋다. 집중해서 연필만 사각사각 거리는 순간을 좋아한다는  아이들도 안다.     


내가  내려가는 항목을 참고해 자신의 생각을 세워 올리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저답게 독창적으로 쓰는 아이도 있다.  부분까지는 공유하기로 약속하고  글이다. 공언하는 말에는 힘이 있으니 우리가  달을  살아보자는 뜻이 담겼다. 지완이는 고생하는 할머니를 위해 방학 동안만큼이라도 자신이 요리해서 드시게 하고 싶다는 기특한 생각을 써서 가슴 찡했다. 민지는 가게  하느라 피곤한 엄마를 위해  동생의 아침 식사를   챙기겠다고 했다. 때로 음식물 쓰레기도 버린다는 말에 놀랐다. 평소 야무지고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학생이라 내게 편견이 있었나 보다. 미안했다.




아이들도 저마다의 생각을 하며 산다.  생각을 붙들  모르고, 표현할  몰라 그저 섣불리 “몰라요.” 남발할 뿐이다. 그러나 조금만 기다려주고 찬찬히 끌어내 주면 “내가 이런 생각 하는  몰랐어요.”한다. 더구나 요즘 세태는 진지충이란 말을  만큼 어떤 사안에 대해 집중하거나 진지하게 말하기 꺼려한다. 그저 가볍고 우습게 대응하는  멋스럽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짙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할 기회도 마음도 없는 청소년들이 대부분이지만, 소그룹으로 모여 마음 나누는 수업 시간에 드러나는 아이들의 생각은 가볍지 않다.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관계가 필요한 이유다.     


예린이가 쓴 글을 보니 율곡의 생각을 닮았고 선생인 내 생각도 담았다. 배운 대로 실력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기특한 아이인데 착하기까지 하다. 쓴 글을 찍어서 보내줄 수 있느냐 물었더니 “선생님 사랑해요.”라며 보냈다. 지완이는 예린이 덕분에 더 잘하고 있다. 사춘기를 지나는 남학생 여학생 조합의 좋은 사례가 되는 지점이다. 지완이 아버지는 사춘기 시작하는 아들 때문에 말도 한마디 못 붙인다며 힘들어했었는데 요즘 지완이가 달라졌어요 한다. 그 까닭을 나는 안다. 하지만 비밀이다. 우리끼리 알기로 한 비밀을 아버지에게 발설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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