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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주 Aug 16. 2021

처음,이라는 고백

받은 만큼 자라는 아이


처음이다. 방과후 수업 오면서 이렇게 지정 노트 만들어서 들고 온 학생은. 오랜 기다림 끝에 수업 신청된 나연이가 첫날 들고 온 공책을 보고 숨길 수 없는 찬사가 나온다. “세상에!” 엄마의 정성이 보였다. 수강신청 시작되는 시간에 필요한 건 스피드, 노하우 공유하는 엄마들은 신청하는 방법을 안다. 이를테면 2월 26일 14시부터 접수 시작이라면 13시 59분에 예약 문자를 걸어놓는다든지, PC에 접속해서 문자 보낸다든지, 아빠전화와 엄마전화 두 대를 이용해 확률을 높인다든지. 해본 엄마들은, 아는 엄마들은 나름의 장치를 하는 반면, 처음인 엄마들은 느긋하게 문자 보내다 필패다. 신학기 시작할 즈음 수강신청에 실패하면 학기 중에 재진입하기는 힘들다. 매월 마지막 주가 수강신청 기간이지만 빈자리가 나지 않으니 도리 없다. 나연어머니는 다달이 문자를 보냈다. 기다리고 있으니 빈자리가 생기면 연락달라고, 대기명단에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7월은 방학 있는 달이라 변동성이 생겨 가장 오래 기다렸던 나연이가 합류했다. 힘들게 합류한 수업이 더 귀하게 여겨지는 마음이었을까.     




4월 어느 날 나연어머니께 문자가 왔다. “수업 대기 중인 나연이가 집에서 뭘 좀 조금씩 해보면 좋을까요?” 책 읽기 좋아하는 아이라고 하니 기본기를 다져주면 좋겠다는 조언으로, 책 읽거나 대화 중 만나는 낯선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 적확한 의미를 아는 습관을 들이는 게 좋겠다고, 보리 출판에서 나온 국어사전을 추천했다. 인터넷 검색이 손쉽다고 생각하지만 단어 하나 찾느라 검색창에 넣으면 더 알지 못할 어휘 나열이다. 출판사 보리에서 나오는 국어사전은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설명이 이해하기 쉽다. 남북 공통어로 쓰려고 했다는 것도, 그림을 삽입해 이해를 돕는다는 것도 추천 이유다. 삼십여 분 가량 통화했는데 지금 기억나는 건 사전을 추천했다는 것만 명료하다. 주고받은 문자가 기록으로 남은 덕분에 몇 달 전 기억이 살아난다. “아직 만나보지도 않은 아이에게 주신 마음 감사합니다. 제가 잘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선생님 해주신 말씀대로 해볼게요. 나연이가 빨리 뵐 수 있었음 합니다.” 수강신청 가능해졌다는 문자 발송 후 바로 답이 왔다. “선생님, 나연이 갈게요. 감사합니다.^^ 나연이 지금 태권도 마치고 왔는데 너무 기대된다고 합니다. 나연이가 “내일부터 잘 부탁합니다.”라고 선생님께 보내달래요.” 아이 말을 그대로 인용해 전달하는 엄마도, 처음이다.     




첫날 수업에 들어온 나연이가 책상 위에 꺼낸 공책을 보고 ‘역시나!’하는 마음이 든 건 그간 주고받은 몇 번의 연락에서 먼저 느낀 엄마의 각별한 관심과 정성 덕분이다. 노트 겉면에 과목 이름 적고 딸을 사랑한다는 멘트도 빼놓지 않고, 첫 장을 열면 “우리 예쁜 나연, 아빠 엄마는 언제나 널 응원해. 언제 어디서든 최선을 다하자. 우리 나연이 파이팅.” 커다란 하트 그려 엄마 마음 넣고 아래에는 선생의 연락처도 챙겨 적었다. 첫날 만난 나연이 모습에서 엄마 사랑 듬뿍 받는 아이라는 걸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고운 아이라는 느낌, 아직 낯설어 쭈뼛거리기는 하지만 친구들이 잘 챙겨주는 모습 보며 교우관계도 좋다는 걸 알 수 있다. 지난 시간에 투발루 조사해보자는 말을 들었을 리 없는 나연이는 오늘은 듣는 역할로 만족해야 한다. 첫 번째 자리에 앉아 친구들이 발표하는 걸 유심히 보는 걸 보니 수업태도도 좋다. 두 번째 수업날은 따로 이르지 않았는데 나연이도 투발루에 대해 조사했다. 그 정성스러운 노트에 꾹꾹 눌러쓴 필체로. 하교후 어머니로부터 문자가 왔다. “2번 수업 들어가 본 나연이 소감입니다. 첫째 날) 엄마, 친구들 얘기만 듣느라 조금 질투났어. 둘째 날) 선생님이 책을 읽어주셨는데 목소리도 예쁘시고 착한 선생님 같더라~ 오늘은 서율이가 발표를 했는데 내가 퀴즈를 맞춰서 과자를 주셨는데 기분 좋았어.^^ 아직 독서논술이 뭔지 몰라 어색한 2학년 나연입니다. 잘 적응하는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렇게 상세한 피드백을 받기도 처음이다.     




세 번째 수업 후 다시 어머니가 문자를 보냈다. “나연이 어제 갑자기 자기는 이제부터 관찰일기를 적겠다더니 낮에 놀이터에서 본 잠자리에 대해서 공책에 적었어요. 내용은 음~ 제가 보기엔 관찰일기도 아닌 것이 그냥 일기도 아닌 것이.^^:: 오늘 선생님한테 보여드린다고 챙겨갔는데 못 뵙네요.^^” (코로나 19 검사받고 결과 기다리느라 휴강한 날이다.) 그다음 수업시간에 교실로 들어온 나연이가 공책을 들고 앞으로 왔다.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선생님만 보세요.” 시원스럽게 쓴 나연이 필체가 공책 한 바닥을 채웠다. <잠자리 : 오늘 자이안센터 앞에서 놀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봤더니 무슨 생물체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얇고 둥근 날개가 4개씩 달려있고 동그란 얼굴에 둥글고 긴 몸통이 있다. 더 자세히 봤더니 빨간색 같아 보였다. 고추잠자리였던 것 같았다. 근데 지금은 여름인데 왜 나와있는 걸까? 지금은 가을에 거의 가까워지지도 않은 것 같은데 정말 부지런한 잠자리 같다. 따라가봤더니 엄청 빨라서 금방 지치고 말았다. 계속 뱅뱅 똑같은 자리만 도니까 뱅뱅이 잠자리라고도 별명을 지어줘도 될 것 같다.> 잠자리 그림도 곁들인 귀여운 관찰일기다. 선생님이 댓글 써도 되냐는 귓속말에 가만히 고개 끄덕이더니, 공책 건네받자마자 펼쳐서 선생이 쓴 글을 보는 모습이 어여쁘다. 관찰한 걸 문장으로 옮겨 쓰고, 나름 질문도 던지고, 별명도 지어주는, 똑똑하면서 마음도 따뜻한 아이다. 다음번엔 물고기 베타에 대해서 썼는데 혼자인 물고기가 슬퍼 보인다고도 썼고, 다슬기 한 마리를 ‘데려왔다’고 썼다. 보편적으로 다슬기는 ‘잡았다’고 하지 ‘데려왔다’고 하지 않는다. 쓰는 어휘를 보면 마음결이 보인다. 엄마의 사랑과 정성을 담뿍 받은 어린아이는 받은 그만큼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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