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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향여행자 May 08. 2020

아빠여행자

오늘도 분주히 아빠를 여행한다


"오늘은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가 아닌 그냥 나로 돌아가는 여행이에요. 내 이름으로 1박 2일의 시간을 갖는 여행입니다. 마음소행 여행에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준비한 설명이 다 끝난 후 시계를 본 나는 절망했다. 아직도 1시간이나 남아버렸다. 이를 어쩌면 좋지.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10분을 떠나보내고 있던 차였다. 버스 안은 적막감으로 공기가 무거웠다. 그때였다. 아빠께서 벌떡 일어났다.  


"여행 가서 다들 사진 많이 찍으시잖아요. 제가 사진 찍는 법을 조금 알려드리겠습니다. 좋은 카메라 필요 없습니다. 요즘 폰들 사진 기능이 워낙 좋아서 이 폰이면 충분합니다. 모두 가지고 계신 폰을 꺼내보세요."


아빠는 어머니들의 잠자고 있던 폰 기능을 깨우셨다. 어머니들은 귀를 쫑긋하고 아빠의 설명을 들으셨다. 구도 잡는 법을 알려주고, 초점의 중요성을 일러주셨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 이해 안 되는 부분을 되짚어가며 설명해주셨다. 아빠에게 저런 다정한 면이 있을 줄이야. 놀라긴 아직 일렀다. 갑자기 안 주머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시는 아빠. 아빠가 꺼낸 건 하모니카였다.      


마지막으로 제가 요즘 하모니카를 연습하고 있습니다. 한 곡 들려드리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뜻밖의 연주를 시작한다. 사람들 앞에서 하모니카 연주를 하는 아빠의 모습은 퍽 낯설었다. 앞쪽 좌석에 앉아 있던 나도, 그 옆에 앉아있던 영상 담당 영남 언니도 눈이 동그래졌다. 언니는 얼른 카메라를 들어 그 모습을 담았다. 10명의 강릉 어머니들과 함께 고성 왕곡마을로 향해 가고 있는 버스 안은 일순간 아빠의 솔로 무대가 되었다.          

  

‘고향의 봄’ 노래가 이렇게 슬픈 멜로디였나.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참고 있는 중이었다. 귀로만 하모니카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연주가 끝나자 어머니들이 열렬한 환호와 박수 소리로 얼어있던 분위기가 깨졌다. 자연스레 한 사람 한 사람 돌아가며 자신의 이름과 사는 곳을 이야기하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1시간이 금세 지나 첫 여행지에 도착했다. 그렇게 그날의 하루는 순조롭게 흘러갔다. 아빠는 역시 현장 체질이구나를 느꼈다. 베테랑 여행 가이드처럼 아빠는 여유롭게 여행을 리드하셨다. 첫날 여행 일정이 모두 끝난 밤, 아빠께 아침의 상황을 물었다.   

    

“도착하려면 1시간이나 남았는데, 계속 그렇게 갈 순 없잖아. 네가 더 이야기를 할 거 같지도 않고. 그래서 나라도 나서야겠다 생각한 거지.”     


앞에 앉아있는 딸의 뒷모습에서 불안을 읽으신 거다. 아빠는 그렇게 내 얼굴을 살피고, 내 뒤통수의 표정까지 살핀다. 5년 전 고향으로 돌아오면서부터 그랬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돌아왔을 때 아빠의 표정은 겨울이었다. 말은 더 차가웠다. 막내가 대학교를 가면서 네 딸이 모두 품을 떠났다. 이제 비로소 좀 홀가분해지나 했는데 때아닌 복병의 등장이다. 그게 다름 아닌 첫째 딸이라니. 좋은 짝을 데려와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해야 하는 타이밍의 나이인 딸인데. 예상을 보기 좋게 깨고 홀로 반백수나 다름없는 상태로 돌아온 서른 살의 딸이 탐탁지 않은 건 당연했다.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아빠였다. 나는 또 그런 아빠를 닮은 딸이었다. 서로에게 냉랭한 시간이 이어졌다.     

 

프리랜서 여행작가로 일주일에 한편씩 기고를 하는 연재 글이 주 수입이었다. 웬만한 건 대중교통을 이용해 취재를 다녔다. 그러다 버스 편도 마땅치 않고, 택시비는 감당할 자신이 없는 곳으로 취재를 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친구를 만날 노력도, 친구를 만들 노력도 하지 않았던 게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결국 아빠께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부탁을 몇 차례 더 하는 뻔뻔한 딸이 되었다. 그때마다 아빠는 말없이 카메라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차 시동을 거셨다. 조수석에 탄 나는 오늘의 취재 일정을 설명한 후 입을 닫았다.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어색한 시간을 견뎠다.    

  

여행지에 도착해서는 아빠도 나도 카메라를 들고 저마다 마음에 머무는 풍경을 담았다. 객관적으로 내 사진과 아빠가 찍은 사진을 비교했을 때 아빠 사진이 훨씬 훌륭했다. 20년 촬영 감독을 하셨던 아빠와 감히 비교하는 게 웃겼다. 자연스레 연재 글엔 내 사진보다 아빠의 사진이 더 많이 게재되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내 카메라의 피사체는 여행지 풍경이 아닌 아빠가 되었다. 아빠 사진이 별로 없다는 걸 깨달은 건 고향집으로 돌아와 다시 꺼내본 앨범에서였다. 늘 딸들의 모습을 담느라 카메라 뒤에 섰던 아빠였다. 사진들 속엔 기억 못 하는 나의 추억들이 채집돼 있었다.   

   

아빠는 왜 그렇게 딸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을까.    


무뚝뚝한 아빠가 야속할 때가 많았다. 수북하게 쌓인 네 딸들의 사진에서 알았다. 아빠는 사진으로 수없이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중학교를 올라가며 딸들은 하나둘 아빠와 거리두기를 시작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 거리는 더 멀어졌다. 엄마와는 친구가 되어가는데 아빠와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갔다. 아빠는 더 이상 딸들을 사진으로 담을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오랜만에 카메라를 드신 거다. 헛헛한 마음을 채워주는 풍경들이 아빠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평소엔 성격이 급한 아빠인데 여행지에선 세상 느린 사람이 되었다. 눈으로 먼저, 마음으로 담은 후 카메라를 드셨다. 가도 되는 길일까. 뭐가 나올지 모르는 길에서 주춤거리는 딸 대신 아빠는 앞서 걷기도 했다. 그런 아빠의 뒷모습을 찍는 날이 늘었다. 그때 알았다. 아빠의 사랑은 뒤에서 온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랑을 늘 한발 늦게 알아버린다는 것도.    

  

아빠와 동행을 한 2년의 시간은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건 아빠가 허리 수술을 하기로 한 전날이었다.      


나는 너랑 여행한 시간들이 좋았어.
    

수술을 앞두고 건넨 아빠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겨우 참은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강해 보이기만 했던 아빠에게서 두려워하는 마음을 읽는 첫 순간이었다. 퇴원을 하는 무렵이 아빠의 생신이었다. 아빠께 책을 만들어 선물해드리기로 마음먹었다. 책도 직접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 참 감사했다. 독립출판 과정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책은 아빠의 사진, 나의 글, 그리고 캐릭터 디자인을 전공한 셋째 동생의 도움으로 완성했다. 나의 첫 책이자 우리 가족의 첫 책 <뷰레이크타임> 은 그렇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한 권을 만들려던 것이 어쩌다 일이 커져 300권을 출판하게 되었다.      


책으로 아빠와 나의 여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아빠와 동행하는 취재가 늘었다. 그렇게 2년이란 시간이 또 흘렀다. 그러다 지난해 4월에 강릉 병산동 마을에 작은 문화공간을 열게 되었다. 지난해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동해안 공간 기반 청년 창업자를 모집했다. 그 지원사업에 선정이 되면서 도움을 받아 문을 열게 되었다. 이름은 소집이다. 한때 일곱 마리의 소를 키웠던 공간이다. 아빠와 난 소집지기가 되었다. 소집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키워가며 함께 성장하는 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싶은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아빠가 소집에 출근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청소다. 바닥을 쓸고, 닦고, 마당을 쓴다. 언젠가부터 꽃을 한 송이 두 송이 심기 시작해 소집 출입구 옆에 아담하게 화단을 만드셨다. 삭막한 벽이 싱그러운 옷을 입었다. 피고 지는 꽃들에서 계절을 만난다.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하는 걸 아빠가 발견한다.


아빠에게 저런 면이 있었나. 나는 미처 몰랐던 아빠를 발견하기도 한다.  


유난히 버거운 올해 봄. 아빠는 소집 옆에 작은 텃밭을 가꾸며 시름을 달래셨다. 적상추, 당귀를 시작으로 고추를 심으셨다. 이어 해바라기와 방울토마토도 심으셨다. 조금씩 해바라기 싹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적상추를 처음 수확했다. 그것으로 저녁 한 끼를 든든히 해결했다.     

 

아빠의 바람과 내 바람이 서로에게 온기가 되어주는 바람이 되어주면 좋으련만. 칼바람일 때가 많다. 매섭게 부는 바람에 마음이 휘청일 때가 많다. 미간부터 찌푸리는 나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금세 후회할 짓을 또 하고 만다. 혼자 소집을 우두커니 지키다 보면 아빠 혼자 소집을 지키는 날엔 어떠할까 생각하면 괜스레 먹먹해진다.      


좋은 일과 아픈 일은 동시에 온다고 했다. 좋은 시간, 아픈 시간을 함께 하고 있는 지금의 시간. 나는 아빠 덕분에 견딘다고 손편지로 고백했다. 고향에 돌아와 5년의 시간에서 팔 할이 아빠와 함께 한 시간이다. 훗날 나는 이 시간이 아주 많이 그리울 것이다. 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할 것을 예감한다. 매일 신경전을 벌이면서도 오늘도 분주히 아빠를 여행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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