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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향여행자 May 08. 2020

탈곡기, 틀곡기가 되다

추억 이야기의 물꼬를 트다


어느 날 아빠가 후배와 함께 탈곡기를 트럭에 싣고 오셨다. 후배의 집에 더 이상 쓸모없어진 탈곡기 하나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날 탈곡기를 난생처음 보았다. 추억이 없는 나에게 탈곡기는 낯설기만 했다.      


페달을 밟아서 볏짚을 이렇게 해서 곡식을 털어냈다는데 나는 영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와릉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아빠와 후배분의 대화에 끼지 못한 채 가만 듣고 있을 뿐이었다.  더 이상 쓸모없어져 한쪽 구석에 방치된 채 덕지덕지 세월의 때만 불어나 있었던 탈곡기. 군데군데 거미들만이 멈춰진 시간을 엮어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에 놓을지 고민하다 소집 출입문 맞은편 담벼락 쪽으로 결정했다. 탈곡기를 내려놓자 긴 잠에서 깨어난 듯 먼지 연기가 하얗게 피어올랐다.  아빠는 열심히 군데군데 먼지와 때를 씻기고 닦아내셨다. 풀어진 부분은 조이고 너무 녹이 슬어버린 부분은 색을 입히셨다. 한결 말끔해졌다.      


탈곡기에 대한 추억이 있는 분들은 소집에 들어오려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탈곡기에게로 먼저 향한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묵혀둔 기억들이 올라온다. 동네 어르신들도 잠시 유모차를 멈추고 탈곡기 추억담을 들려주신다.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내겐 탈곡기에 대한 새로운 추억이 더해진다.      


한때 벼, 보리 낟알을 떨어내며 분주했던 탈곡기는 이제 추억 이야기의 물꼬를 트는 틀곡기로 소집을 함께 지켜줄 고마운 친구가 되었다. 고물에서 고물(고귀한 물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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