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어떤 날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향여행자 Jul 16. 2020

알았더라면 시작할 엄두도 못 냈을 일

방송구성작가

작가님, 추천하고 싶은
출연자가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얼마 전 걸려온 전화 한 통. 여전히 날 방송작가로 기억하는 사람의 전화였다.


"죄송하지만... 제가 이젠 그 일을 하지 않아요."


그 일을 관둔지도 어느덧 10년이다. 하지만 불쑥 걸려온 전화가 10년이란 시간을 무색하게 한다. 그 일은 어제 일처럼 생동하다. 고작 2년이란 시간이 전부지만.


알았더라면 시작할 엄두도 못 냈을 일. 방송구성작가. 보통은 각 방송사 아카데미를 다니며 기본을 배운 후 막내작가로 입문한다. 난 그 당시 휴학을 한 상태에서 무언가를 해보자는 생각에 이런저런 일을 찾아보던 중이었다. 방송을 해보고 싶은 호기심에 시사교양프로그램 막내작가 모집 공고를 보자마자 무턱대고 지원했다. "경력 무관" 이라는 한 줄에 용기를 냈다. 면접 연락이 왔고 면접을 본 그 자리에서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느냐는 메인 작가 언니의 물음에 '네'라고 답했고 덜컥 합격을 했다. 몰랐으니 시작했지. 알았으면 쳐다도 보지 않았을 일을 시작한 거다. 월급 80만 원. 박봉에  기피대상 1호라는 생방송을 하였고, 아침 프로그램을 했다.


1시간 방송 속에 다섯 코너의 프로그램이 있는 아침 생방송. 메인 작가 언니, 다섯 명의 서브 작가 언니와 7명의 피디님들과 함께 한 팀을 이루어 일했다. 기본 용어조차 숙지하지 못한 채 시작했으니 실수투성이였다. 엄청 혼나면서 배웠다. 혼날 때마다 기분이 상했지만 돌이켜보면 기본 용어도 못 알아듣는 막내가 들어왔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다. 혼내는 것 또한 애정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지금은 그때의 배움이 큰 재산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때 작가 언니들에게 아주 많이 고맙다. 지영 언니. 우경 언니. 현숙 언니. 수아 언니. 효정 언니. 경 언니. 이젠 그리움이 된 이름이다.


생방송이 있는 날은 방송 시간 내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방송은 일주일에 한 번  1시간이지만 그 1시간 방송을 위해 작가 언니들과 피디님들은 요즘 말로 영혼을 탈탈탈탈 갈아  넣으셨다.생방송을 마치고 후련해진 마음으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던 삼겹살집. 낮술의 묘미를 그때 알았다. 남들 퇴근 시간 무렵이 돼서야 끝나곤 했던 회식. 영혼을 회복하는 시간이었다. 방송 당일과 그다음 날이 쉬는 날이고 그다음 날부턴 다음 주 방송을 위해 치열하게 일주일을 보내는 사이클이 매주 이어졌다. 그러다 입봉을 하여 작은 코너를 맡게 되었다. 일을 시작한 지 6개월쯤 무렵이었다. 긴장감은 더욱 배가 되었다. 잘못 쓴 원고 한 줄이 누군가에게 엄청난 피해를 줄 수도 있는 일이다. 치명적인 방송 사고를 낼 수도 있는 일이다. 정확한 정보인지 확인 또 확인하는 것이 일이었다. 그때의 강박이 지금도 여전하긴 하다. 그 일을 시작한 지 1년이 되었을 무렵.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그 일을 계속하고 싶었지만 그 일을 계속하고 싶으면 졸업부터 하라는 부모님의 성화를 이기지 못했다. 겉으론 퉁명스럽게 말씀하셨지만 실은 그렇게 고생하면서 고작 80만 원을 받는 딸에 대한 안쓰러움이 더 크셨던 거다.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길 바라셨다. 하지만 나는 결국 졸업하고 다시 방송국으로 돌아왔다. 선택한 프로그램은 공교롭게도 늘 시청률 비교를 하던 동시간대 타 방송사 생방송 프로그램이었다.


알았으니 쳐다도 안 볼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또 끌리는 게 생방송이고 아침방송이었다. 같은 생방송이고  아침방송이지만 두 번째 방송 프로그램은 교양 프로그램이고 토크쇼여서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연사를 초청하여 그 사람의 희로애락을 듣는 일은 곧 인생 공부를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담당 코너가 바뀌어 나는 '부부'를 테마로 하여 매주 아이템을 찾아야 했다. 사실 첫 방송 프로그램에서 주로 담당했던 코너 역시 '부부'를 테마로 한 것이었다. 그 당시엔 공감하지 못한 채로 부부를 만났다. 세상엔 문제없는 부부가 없음을 그때 알았다. 결혼에 대한 환상도 그때 다 깨졌다. 그때는 일을 해야 하는 의무감에 들었던 이야기들이 지금 힘을 발휘한다. 나이 터울이 꽤 큰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편하다. 그분들과 거리감이 없고 어색함이 없는 게 그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나보다 어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불편하고 어색할 때가 많다.


여전히 생생한 두 방송이 있다. 불가능한 것은 없음을 가르쳐 주었다. 오형제, 오공주 다둥이 가족을 찾아야 했던 일. 24살 연상연하 부부를 찾아야 했던 일. 어떻게 찾아야 하나. 찾을 수 있을까. 결국 찾았고 고생은 결국 시청률로 보답받곤 했었다. 여전히 두 방송 프로그램은 장수 프로그램으로 두 방송사의 아침을 지키고 있다. 가끔 그 프로그램들을 볼 때마다 사람들이 앞면을 보는 동안 나는 그 뒷면을 읽는다.


때때로 지금 하는 일들이 힘들 때마다 그때를 생각한다. 나의 비교치는 그때의 2년이다. 그때 했던 일을 생각하면 '이걸 왜 못 해' 나태해지려는 나를 다잡기도 한다. 첫 업으로 방송작가를 택한 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엔 너무나 힘들었지만 빡센 2년이란 시간이 지금도 꽤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니까. 가끔 후회를 하는 순간을 물어올 때가 있는데 방송작가를 그만두었을 때라고 답하곤 한다. 만약 그때 조금만 더 끈기를 갖고 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하니까.


예전에 어떤 부장 피디님이 불쑥 내게 기은이는 엄청 무서운 메인 작가가 될 거 같다고 하셨다. 그땐 무슨 의미인지 몰랐는데 지금은 좀 알 거 같다. 그 일을 해야지 마음먹기까진 오래 걸리는데 진짜 좋아하는 일을 할 땐 완전히 푹 빠져서 하고,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으니까. 또 대충 하는 사람을 몹시도 싫어하고 인내심을 갖고 잘 기다려주는 사람이 아니니 후배에게 엄청 깐깐하고 무서운 선배가 되었을 거다.

  

가끔 24시간이 모자랄 만큼 일을 하는 나를 신기해하며   어떻게 혼자서 그 많은 일을 하냐고 누군가 묻곤 한다. 사실 지금 하는 일들은 힘든 축에 끼지도 못한다. 마음 붙는 일이고 자발적으로 좋아서 하는 일이니 힘든지 모르고 하기도 한다. 가끔 마음 붙지 않는 일을 마주할 땐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고 결과도 좋지 못하다. 고쳐야 하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이런 못난 성격도 이젠 품으려 한다.

 

혼자 일하는 게 여전히 제일 편하기도 하다. 그래도 함께 할 때가 훨씬 큰 시너지를 내는 것 또한 잘 알기에 발걸음을 맞추는 노력을 해나가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아침. 문득 이 시간에 생방송을 앞두고 방송국 복도를 분주히 뛰던 스물다섯 살의 내가 떠오르는 아침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닷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