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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향여행자 Jul 20. 2020

힘들 때마다 뒷걸음질 치기보다

한 걸음 내딛는 사람

언니 몇 밤 자고 와?


내가 대학에 입학하며 집을 떠나던 날이었다. 11살 터울의 막내 동생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늘 같이 자고 하던 큰 언니가 이제 같이 살지 않는다는 것에 동생은 많이 슬퍼했다. 9살인 막내가 처음 경험하는 이별이었다. 기숙사로 짐을 싣고 가는 길. 막내는 같이 그 길에 올랐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던 순간에 또 물었다. 언니 몇 밤 자고 와?.  아빠, 엄마, 막내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먹먹했다. 그날 밤 울었던 기억이 난다.


언니의 방학을 손꼽아 기다렸던 막내. 강릉에 오면 제일 반겨주는 동생이기도 했다. 그런 동생이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어느덧 대학교를 진학할 무렵이 되었다.

 

언니 나 그 과 꼭 가고 싶은데
어떡하면 좋지?


수능 성적표를 받고 나서 자신이 가고 싶은 과를 갈 수 없을 거 같다며 내게 울먹이며 전화를 했던 막내 동생. 동생이 고2 때였나. 내가 강릉으로 휴가를 왔을 때 동생은 광고를 전공하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냈다. 막내마저 창작 전공을 하겠다니. 막내는 안정적인 전공을 택할 줄 알았다. 형편이 좋지 못한 집안 상황을 누구보다 체감하며 살아온 동생이어서 취업 보장이 확실한 과를 선택할 줄 알았다. 나는 동생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혹시나 마음이 바뀌진 않을까 싶었는데 그 마음은 더 단단해져 있었다. 수능 점수가 그 단단한 마음을 위태롭게 했다. 동생에게 정말 그 과를 가고 싶은지 다시 한번 더 물었다. 꼭 가고 싶다는 동생의 말. 나는 동생에게 실기와 면접으로 뒤집을 수 있는 학교를 알려주었다. 하지만 실기와 면접시험까지는 고작 한 달 남짓이었다. 준비 시간은 턱없이 모자랐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학원을 다니려 했지만 너무나 고액이라 동생은 차마 학원을 다닐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동생은 부랴부랴 입시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엄마는 일하기 바쁘고, 나는 회사를 다니느라 바쁘고, 둘째, 셋째 동생도 자신의 일들에 정신이 없다 보니 아무도 막내의 입시 준비를 도와주지 못했다. 고작 한 거라곤 실기 날과 면접날에 각각 나와 둘째 동생이 함께 가준 것뿐이다. 실기를 보고 나오는 막내에게 어땠는지 물으니 밝은 표정으로 답했다. 절박한 만큼 치열하게 준비했던 동생의 노력이 빛을 발휘한 것이다. 예감이 좋았다. 예감은 적중했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합격을 했다는 소식에 가족 모두가 놀랐다.  합격 소식 전날 다른 학교의 합격 발표가 있었다. 가고 싶은 과는 아니지만 차석으로 합격했다.  2년 등록금 면제라 엄마는 내심 그 학교를 가길 바랐다. 하지만 다음날에 자신이 원하는 과에 합격한 동생은 일말의 고민 없이 자신의 힘으로 당당히 합격한 학교를 택했다.


그렇게 원하던 학교를 간 동생은 자신이 택한 전공이었기에 매 학기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늘 비싼 등록금이 동생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스스로 그 무거움을 견뎌냈다. 장학금을 받기도 하고 학자금 대출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2년을 다니던 동생은 어느 날 내게 또 고민을 털어놓았다. 취업에 대한 걱정이 컸다. 휴학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으니 뚜렷한 계획은 없다고 했다. 지쳐있는 마음을 읽었다. 여행도 좀 다니고 찬찬히 쉬면서 생각할 시간을 가지라고 했다. 알겠다고 했으나 동생은 며칠 못 가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나라도 좀 여유가 있으면 좋으련만. 보태주지 못하는 마음이 아팠다.


막내는 그런 아이였다.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부모님께 손 벌리기보다 자신이 벌어서 사는 아이였다. 고등학교 때로 기억한다. 사고 싶은 패딩이 있어서 그걸 사기 위해 방학 때 횟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랬기에 대학교를 가면서 더더욱 자신의 삶을 스스로 야무지게 일구어 나갔다. 동생이지만 참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마음은 여전하다.


동생은 휴학을 한 후 팔 할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동생이 복학을 몇 달 앞두고 어느 기업의 대학생 마케터 모집에 지원을 하였다. 합격을 하였고 몇 달 동안 부지런히 활동을 하였다. 마무리하던 날. 최우수 팀으로 선정되어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대견했다.


올해 오랜만에 복학을 한 동생은 때아닌 코로나 19 시대를 맞아 대혼란을 겪었다. 학교 강의실 대신 집에서 노트북으로 강의를 듣는 답답함을 경험해야 했다. 등록금은 등록금대로 내고 생활비는 생활비대로 나가고. 어디 의지할 데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꿋꿋이 이겨나갔다. 한동안 과제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또다시 고비가 왔다. 끙끙거리면서도 며칠 밤을 꼬박 새면서  하나하나 헤쳐나갔다.


그리고 오늘 몇 시간 전. 동생은 네 자매 단톡 방에 사진 한 장을 공유했다. 성적표였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올 A+. 경이로운 성적표였다. 그동안의 고생이 읽혔다. 그 고생을 고스란히 보상받는 결과였다. 정말 자랑스럽다. 가족 모두가 힘든 시기에 전해준 기쁜 소식이라 더더욱 감사하다.


힘들 때마다 뒷걸음질 치기보다 한 걸음 내딛사람. 그래서 나는 막내가 누구보다 잘 될 사람이라는 걸 예감한다.

 

동생의 성적표 살포시 공개해봅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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