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요. 어차피 다른 사람도 다 뺏길 거니까
AI가 화제입니다. 유튜브를 열면 서로 상반된 두 가지 트렌드가 눈에 띄어요.
하나는 불안입니다. "AI가 대체하지 못하는 직업", "AI 시대에 살아남는 법" 같은 영상이 끊임없이 올라옵니다. 댓글창에는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가득하죠. 또 하나는 AI 아트입니다. 사람들이 AI로 이미지를 만들고 음악을 생성해 공유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AI 작품임을 알면서도 신나게 즐기고 소비해요.
흥미로운 건 이 두 현상이 한 시대에 공존한다는 점입니다. 한쪽에서는 일자리를 뺏길까 봐 두려워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AI의 결과물을 기꺼이 즐깁니다. 이 두 현상은 모순되는 걸까요, 아니면 같은 본질을 말하고 있는 걸까요?
먼저 불안의 트렌드를 들여다봅시다. 주변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는 거부입니다. 산업혁명 시절 기계를 부수던 러다이트 운동처럼 AI를 거부하고 인간의 영역을 사수하려 합니다. 둘째는 디스토피아입니다. 인간이 쓸모없어지는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죠. 셋째는 생존 전략입니다. AI가 대체하지 못할 직업 목록을 찾아 헤매며,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고 안도하려 합니다.
하지만 저는 질문 자체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AI가 대체하지 못하는 직업이 뭘까?"라는 질문은, 이전 게임의 규칙을 들고 새로운 경기장에 입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기술이 직업을 대체하는 장면을 숱하게 봐왔습니다. 필경사는 타자기에, 타자수는 워드프로세서에 자리를 내줬죠. 마차를 몰던 사람은 택시를 몰게 됐고, 전화교환원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름의 생존 전략을 알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기술의 그늘을 피해 살아남는 쪽으로 이동하면 된다고요.
요즘 유튜브에 'AI 잘 쓰는 법'이나 'AI 모르면 도태된다'는 식의 불안 마케팅이 쏟아지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다들 예전처럼 새로운 도구 사용법(How)만 빨리 익히면 다시 '빛'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 믿는 거죠.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다릅니다. 그늘을 피해 이동하면 됐던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빛'이 어디인지가 보이지 않아요. 아니, 어쩌면 그늘과 빛이라는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정 직업 하나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시대의 원리 자체가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프로그래밍의 전설 켄트 벡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AI로 인해 내 일의 90%의 가치는 0달러가 됐다.
하지만 10%의 가치는 1000배가 됐다."
AI가 가장 잘한다는 코딩 분야의 대가가 자신의 일 90%가 가치를 잃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기회라고 말합니다. 그 90%는 'How(어떻게)'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포토샵 사용법, 엑셀 함수, 코드 작성 기술처럼 '어떻게'를 아는 것이 예전에는 전문성이자 밥벌이의 근거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How는 AI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가치가 된 것이죠. 반면 남겨진 10%는 What(무엇을), Why(왜), Which(어느 것을)의 영역입니다. 판단과 방향을 결정하는 이 10%의 가치가 이전보다 1000배 커진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 10%는 단순히 비전을 세운다고 생기지 않습니다. 거기엔 더 깊은 층위가 있어요.
하나는 안목(Taste)입니다. 오랜 경험에서 길러지는 감각이죠. 디자이너가 무언가를 보고 "어색하다"고 느끼는 것, 개발자가 코드를 훑다 "냄새가 난다"고 직감하는 것. 딱히 설명은 못 해도 무엇이 더 나은지 아는 감각입니다. 도구는 평준화되었지만, 그 도구를 다루는 '눈'은 여전히 다릅니다.
또 하나는 시스템을 꿰뚫어 보는 힘입니다. 요리사가 레시피를 외우는 것과 재료가 열에 반응하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다르듯, 표면 아래의 원리를 아는 사람만이 도구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켄트 벡의 10%도 수십 년간 How를 직접 손으로 해오며 시스템의 깊은 곳을 들여다봤기에 폭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역설이 생깁니다. 실행(How)의 가치는 0이 됐지만, 그 실행을 거쳐온 경험의 가치는 오히려 더 커졌다는 점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이것이 안목의 본질입니다. AI도 데이터를 먹고 자라듯, 인간의 안목 역시 수없이 반복했던 How라는 데이터를 스스로 학습한 결과물입니다. AI의 학습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은 그 과정에서 '자기만의 눈금'이 생긴다는 겁니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에 대한 자기만의 기준, 즉 Taste가 결국 10%의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시대일까요? 역설적으로 AI와 함께 그 How를 폭발적으로 쌓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예전에는 '눈'을 갖추기 위해 10년의 시행착오가 필요했다면, 이제는 AI와 함께 하루에 100개의 시안을 뽑아보며 즉각적인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10년의 축적을 압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죠.
다시 AI 아트 트렌드를 봅시다. 사람들은 왜 직접 AI로 만들 수 있는데도 타인의 결과물을 소비할까요?
도구는 같아졌지만 그 결과물을 만들어낸 안목과 철학은 각자 다르기 때문입니다. 특정 창작자의 결과물에는 그만의 일관된 취향이 묻어납니다. 사람들은 결과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추동하는 세계관에서 오리지널리티를 봅니다. "완성본을 주세요"라는 말은 결국 "당신의 취향을 믿어요"라는 뜻입니다.
불안과 AI 아트, 이 두 트렌드는 결국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노동을 팔아서 돈을 번다"는 산업혁명 이후의 낡은 프레임이 바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누군가의 What과 Why를 따릅니다. 다만 관계의 형태가 고용-임금에서 팔로우, 후원, 구독으로 달라지고 있을 뿐입니다. 자기만의 What과 Why를 가진 사람에게 모여드는 갈증은 끝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디자이너, 개발자, 기획자가 각자의 How를 담당하고 디렉터가 방향을 잡았습니다. 디렉터가 되려면 오랜 경력이 필요했죠. 지금은 다릅니다. AI가 팀원들의 How를 대신하면서, 누구나 첫날부터 모든 AI 도구를 지휘하는 디렉터의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디렉터'는 직업이 아니라 삶의 태도입니다. 무언가를 만들고, 방향을 잡고, 자기만의 기준으로 선택하는 것. 디렉터의 본질은 "이건 된다, 이건 안 된다"를 가르는 자기만의 눈금을 가진 사람입니다. 노동 시스템이 어떻게 바뀌든 이 존재 방식은 남습니다.
이제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어떤 직업이 살아남을까?"가 아니라,
"나는 어떤 기준을 가진 사람인가? 나는 내 삶을 디렉팅할 준비가 되었는가?"